김유정의 제주도 35. 가파도<3> 

지정학적 위기를 타는 약소국
무서운 일본 식민지 어업경영
가파도 제주 전역 창고 설치 

△러일전쟁 이후 제주도 바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거의 십 년 단위로 큰 전쟁을 치렀다. 이에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국민들은 내심 열광하고 있었다. 전쟁은 어느 것보다도 결과가 확실하여 승리를 통해서 자국 국민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고 나라의 경제적인 이익도 빨리 얻을 수 있어서 점점 더 전쟁의 유혹으로 빠져들어 갔다. 유혹이 센 만큼 일본은 군사력 증강에 노력하여 우수한 무기와 잘 훈련된 군대를 유지하였다. 19세기 말 급변하는 동아시아 질서를 일본이 주도하려고, 일본은 한일수호조약(강화도 조약)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 견제를 위한 방어선으로 삼기 위해 조선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려 했고, 반면 청나라는 조선을 자신의 속국으로 생각한 나머지 일본과 세력다툼을 벌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끝에 일본을 밀어내어 일시적으로 조선에 청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김진기, 2023). 그러나 일본은 일보 후퇴 이보 전진을 실행한 듯 1885년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통고한다"라고 규정한 톈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으며, 더욱 군비를 확장하며 군대를 키우던 일본은 1890년대 전반 마침내 청나라에 열세였던 군사력을 새로 만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급기야 일본에 기회는 왔다.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 정국이 불안해지자 조선 정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일본군도 이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보내 인천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대와 격돌했다. 바야흐로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의 결과 일본군이 승리를 했으며, 일본은 그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케 하고,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대만과 랴오둥반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정학은 그냥 평범한 장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선과 중국의 지정학적 상황으로 보아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령은 대륙 침략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었기에 앞으로 러시아에 큰 위협이 될 것이 뻔했다. 

러시아는 고심 끝에 일본으로부터 랴오둥반도에 대한 반환 요구가 혼자의 힘으로 버겁다고 생각하여 독일과 프랑스와 3국이 연합하였고, 이 3국 간섭으로 러시아는 일본이 반환시킨 랴오둥반도를  청나라로부터 조차(租借)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소연할 때 없었던 일본으로선 매우 불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러시아의 등장으로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이 어려워졌고, 특히 러시아가 조선을 빼앗아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을 노려본다면, 일본의 고립은 불 보듯 뻔해서 꼼짝없이 일본의 국가 존위도 지킬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다시 일본의 머리 회전이 빨라졌다. 급기야 일본은 러시아에 만주를 지배하도록 인정하는 대신에 러시아는 일본에 조선을 지배하도록 인정해달라는 교섭을 벌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이 벌인 이 무서운 러시아와의 외교 거래는 결국 지정학적 이해득실 속에서 약소국이 처한 조선의 기막힌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득세하고, 일본 국민이 열광하는 마당에 그냥 물러설 메이지 정부가 아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의 제안이 무엇인지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일본은 이미 영국과의 동맹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터에 영국도 러시아의 진출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는 같은 결론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 수상 가쓰오 다로와 그의 후원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결국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토 히로부미의 정책을 무시하여 1902년 1월 30일 서둘러서 영국과 동맹을 맺어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교전 행위는 이미 이틀 전에 시작되었다(W,G. 비즐리, 2004). 러일전쟁 또한 강국으로 부상하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지만 러시아의 국내상황이 일본을 도운 것이다. 당시 러시아의 패배는 국내 상황이 한몫을 했는데 한창 러시아에 혁명의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던 만큼 정세가 매우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그런 러시아를 이겼지만, 배상금을 받아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 후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가 중단되자 조선을 방어선이 아니라 '시장'으로 간주하고 차차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다(카와이 아츠시, 2007). 

△가파도의 일본인 

러일전쟁(1904~1905) 이래 제주도를 침탈하는 일본인 어민들이 날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연달아 승리하면서 일본의 국력은 빠르게 성장하였고, 이런 경제력 증가의 밑바탕에는 전쟁이 큰 돈벌이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패전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간섭하지 않는 한반도는 일본의 독주 무대가있는 교훈을 얻었다. 1905년 제주도 연안은 더욱 일본 어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제주도 부속 섬마다 일본 어민들의 창고가 안 보이는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1905년 당시 제주도와 부속섬에 있는 창고 수와 일본 어민을 헤아려 보면 제주도 어장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파도는 창고 2채에 40명, 비양도는 창고 4채에 80명, 당포는 창고 1채에 20명, 서귀포는 창고 3채에 60명, 산지포는 창고 1채에 20명, 백빈항은 창고 3채에 60명, 방두포는 창고 1채에 20명, 성산포는 창고 5채에 100명, 행원포는 창고 2채에 40명, 별도포는 창고 2채에 40명, 곽지포는 창고 1채에 20명, 함덕포는 창고 1채에 20명의 일본어민 등이 있었다. 합계 창고는 모두 28채이며, 일본어민은 520명이 제주도에 침탈해 있었다, 또한 제주 성안에도 일본 들이 살고 있었는데 7호 수에 32명(남23, 여9)이었고, 이들의 직업은 관리 2명, 잡화상 2명, 해산물 중매 2명, 과자상 1명, 우편수취소 1명, 여인숙 1명, 매약(약국) 2명, 뱃사람 4명, 목수 1명 등이 있었다.  

제주도 근해는 이미 어장이 풍성하기로 소문이 났다. 당시 일본 정부가 바라는 것은 제주도 연안이 빨리 일본인의 손으로 개발되기를 바랐다. 그들의 자체 분석하기를, "조선인은 풋내기 어업으로 서툴러서 항상 일본어민의 사업을 따라 하고 있으며, 일본인은 색다른 기계로써 솜씨 있는 어업을 하며 그 수확물을 염장이나 다른 방법(말려서)으로 본국에 수송한다." 사실상 제주도 어업의 계절적인 전성기(漁期)에는 일본어선이 폭주하여 무려 200척에 이르는데 그 어로방법으로는 상어주낙, 돔주낙, 잠기기어업에 의해 상어, 전복, 돔, 해삼, 김, 우뭇가사리, 미역, 고래, 다랑어, 방어, 삼치, 감태 등 해산물 전반에 걸쳐서 약탈해 갔다. 

일본인들의 어로시기와 방법을 보면, 가파도에서는 상어주낙을 6월~12월까지 놓으며, 잠수기는 1월 12월까지 연중 내내 작업을 했다. 잠수기 한 척에 보통 9인이 타며, 상어주낙은 7인, 돔주낙은 4인, 개별 낚시는 4인, 나체단(나잠, 남자어사)은 20인 등 배를 타서 작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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