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이 누렇게 변하고 메밀밭이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다. 여름이 다가오는 듯하다가도 느닷없는 비가 반복되는 등 계절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한 이상기온이 불안하다. 메밀이 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구경꾼의 입장을 벗어나 생각하면 종잡지 못하는 날씨는 웅크린 꽃들을 떨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메밀은 척박하고 서늘한 땅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그런 땅에서 잘 자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존재가 척박한 땅에서 살려고 하겠는가. 생명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형상을 보고도 사람들은 자기만큼씩 생각하기에 어떤 이는 '빛의 혁명'이라 이름 붙인다. 허풍이 약간 섞인 재치 있는 비유라며 웃었지만 그럴싸한 해석이다. 그러고 보니, 할 말이 많은 군중의 입처럼 오밀조밀한 꽃 주변으로 설핏 붉은 핏줄이 서 있다. 메밀이 나라면? 내가 메밀이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이런 상상을 하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오랜만의 여유다. 차라리 달밤에 걸었으면 더 운치 있겠나 싶다. 

이즈러는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즘생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왼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얬었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부분)

이효석은 밤길에 본 메밀밭 풍경을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혀 하얬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달빛에 숨이 막힐 정도로 흐뭇한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흐뭇하다는 뜻은 사전적으로 말하면, 만족스러워 불만이 없고 기쁘다는 뜻이다. 언제 흐뭇할까? 내가 베푼 호의적 행위로 인해 누군가 만족스러워할 때 흐뭇할 것이다. 또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콩 한 쪽을 나누어주는 것 행위 같은 것이다. 예전에 재밌게 보았던 미국 단편 영화 중에 마음이 흐뭇해지는 작품이 있다. 미국에서 1989년에 제작되었다고 알려진 'The Lunch Date 런치 데이트'란 영화다. 

영화의 무대는 미국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기차역이다. 백인 여성(스카치 블로치 역)이 쇼핑백을 들고 붐비는 기차역으로 들어서다 흑인 남성과 부딪쳐 쇼핑백 안의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지고 만다. 여성은 기차를 놓치고 지갑마저 잃어버린다. 카페에 들어가 조금 있는 동전으로 샐러드 한 접시를 계산하고 자리를 잡고 포크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포크를 가지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노숙자로 보이는 흑인 남성이 앉아서 샐러드를 먹고 있다. 자신의 샐러드라고 말하지만 웃기만 하며 먹는다. 할 수 없이 둘은 한 접시의 샐러드를 같이 먹는다. 그러기를 반복, 샐러드가 동이 나자 남자는 일어서서 커피 두 잔을 들고 온다. 기차 시간이 다가오자 여자는 일어섰고 성급히 달리다 가방을 놔두고 온 걸 알아차리고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 자리엔 좀 전에 다 비운 접시와 커피잔만 덩그라니 놓여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것은 좀 전에 앉았던 옆 테이블에 놓인 손도 대지 않은 샐러드와 쇼핑백이었다. 백인여성이 남의 자리에 앉아 흑인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던 것이다.

영화 '런치 데이트'는 편견이 얼마나 무섭고 우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흑인남성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면 자신이 앉은 자리에 대한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자신이 길을 잘못 들었을 거라는 의심은 없고, '당신이 왜 내 자리에 앉은 거야?'라는 의심만 있었다. 그런 편견을 알면서도 흑인남성은 여성이 자기 앞에 앉아서 자신의 샐러드를 먹는 것을 용인했고 커피까지 갖다주었다. 자신의 처지가 어려우면서도 말이다. 자신이 정답이라고 알고 있는 오만이 얼마나 무섭고 우스운지 오규원 시인은 이렇게 시로 썼다. 

뒷집 타일 工場(공장)의 경식이에게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더니 동그라미라 하고
연탄장수 金老人(김노인)의 손주 명하는 쓰레기를 쓰레기라 하고
K식품 회사 손계장의 딸 연희는 빵을 보고 빵이라 하고 연희 동생 연주는
돼지 새끼를 보고 돼지 새끼라고 했다.

다시 한 번 물어봐도 경식이는
동그라미를 동그라미라 하고
명하는 쓰레기를 쓰레기라 하고
연희는 빵이라 하고 연주는 돼지 새끼라 한다.
또다시 물으니 묻는 내가 우습다고 히히닥하며
나를 피해 다른 골목을 찾는다.

정답 만세!
그리고 정답 아닌 다른 대답을 못하는
우리들 어린 王子(왕자)와 公主(공주)에게 만세 부르는(칭찬 해준) 우리의 어른들 만세!
(오규원 시 「우리들의 어린왕자」 전문)

영국 하트퍼드셔대 심리학과 리처드 와이즈먼 교수와 에든버러대 캐롤라인 와트 교수가 의미있는 실험을 하였다. 

토끼와 오리', '젊은 여성·노부인' 과 같은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지 답한 뒤 성격과 사고방식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한 후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한 것이다. 결과는 문화적 익숙함이 인지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즉 내가 알고 있거나 그렇다고 믿고 있는 어떤 이미지에 대한 생각은 문화적인 요인에 의해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일까.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들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든다" 제인 오스틴의 문장으로 하고픈 말들을 대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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