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에 맞춰 어머니집을 방문했더니 어머니는 숨을 헐떡이며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투표를 하러 학교 운동장으로 걸어가다가 숨이 차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투표하라고만 하지 말고 이럴 때는 누가 업어다 주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린다. 할 수 없이 내가 그 일을 해보겠다 자청하고 어머니를 업고 인근 중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선거사무원들이 당황스러워하며 등에 업힌 어머니를 내린다. 어머니는 몸을 기우뚱하며 투표용지를 받고 장막이 쳐진 장소로 이동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장막 안에서는 어리둥절한 그림자와 함께 "이거 어드레 찍는 거니"라는 물음이 쩌렁쩌렁 울린다. 선거사무원들도 나도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눈만 껌뻑인다. "아무데라도 찍읍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비밀투표가 아니라면 얼른 가서 찍는 방법을 알려주었을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투표는 어찌어찌 마무리했고, 다시 어머니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제야 어머니의 무게를 감지한다. 어떻게 업어야 하나 하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야말로 솜처럼 가벼워진 어머니의 몸의 온기가 등을 타고 스며든다. 모처럼의 가족상봉처럼 가슴이 뜨겁다. "제대로 업어라" "앞을 똑바로 보고 걸어라"는 잔소리에 그냥 주저앉고 싶었던 마음도 어느새 사라지고 오래오래 살아달라는 부탁의 말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했다. 

오래 저물지 않는 저녁 

우연히 모인 돌들처럼 놓여 있었다
뼛속 바람은 본디 한 곳에서 온 것

너무 깊은 곳에 매듭이 있어서 바람은 돌들은
입을 꾹 다문 어둠만 보여 주었다

이렇게 오래 저물지 않는 저녁을 본 적 없었다
누군가 발로 차 줄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쇠창살에 갇힌 채 트럭에 실려 가던 개의 눈빛처럼
빨리 잊고 싶은 것들이 모여 돌들이 되었다

인질을 사랑하는 범인처럼 어둠이
저녁의 목을 놓아주자 바람이 돌둘이

어둠 속 제 뼈를 보여주었다
(조혜정 시 「가족」 전문) 

가족이라고 다 살갑고 애뜻하고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남보다 더 앙금이 깊고 마주 앉아도 할 말이 없고, '저물지 않는 저녁'처럼 스산할 때도 많다. '뼛속 바람은 본디 한 곳에서 온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쇠창살에 갇힌 채 트럭에 실려 가던 개의 눈빛처럼 빨리 잊고 싶은 것들이' 많아 그렇다. 가족끼리 왜 그러냐는 말은 또다른 상처가 되기도 한다. 가족이라서 더 그렇다는 것을 왜 모를까 싶어서 섭섭한 마음도 커진다. 가족끼리는 서로가 인질이 되어 서로를 놓아주지 못하거나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화해와 용서를 내면화하기엔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 까닭이다. 

4·3연구소가 개최하는 '사령관의 그림자' 상영회·GV를 보고 왔다. 영화 '사령관의 그림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아들인 한스 위르겐 회스, 손자인 카이 회스와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아니타 라스커-발피쉬, 딸인 마야 라스커-발피쉬의 현재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보는 내내 아주 바람직한 다큐멘터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화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하물며 가족끼리도 금이 가는 일이 생기면 화해하기 쉽지 않은데 말이다. 

가해자와 피해 생존자는 어떻게 만나 화해할 수 있을까. 위험한 말이지만 가해자에게도 서사가 있다는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의 아들인 한스 위르겐 회스, 손자인 카이 회스가 갖는 죄책감을 이해할 때 대화가 성사된다. 피해자에게만 서사가 있다는 전제는 공동의 책임보다는 가해자 측의 책임만을 묻게 된다. 책임은 누가 지는 것인가. 가해자 당사자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인가. 국가권력 또는 제국주의 폭력 같은 구조적 폭력이 낳은 피해를 개인 당사자가 질 수는 없는 것이다.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용기와 단호함, 통찰력 같은 것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되 책임은 공동의 책임이어야 한다는 합의가 화해의 다른 이름다. 내가 아픈 것처럼 그도 괴로울 것이라는 마음을 아는 것. 그러니까 결국은 사랑이다. 사랑, 참, 쉽고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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