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40. 제주 해안에 표착한 열강의 배 <1>

대정현 해안 표착지로 유명
제주도 동아시아 항로 중앙 
홍모인 해적 상인 은전 탈취

△미변선이 들끓는 제주도 모슬포와 화순포 해안

외국 배를 부르는 용어를 보면, 미지의 외국배를 황당선이라 하였고, 다음에 서양 배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이양선, 그리고 국적을 알 수 없는 배를 미변선이라고 하여 정체불명의 외국배들을 말하는 역사적 순서이다. 언어도 시대에 따라 생성되고 변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천포(화순포) 해안은 예로부터 배들의 표착지나 피항지로 유명했다. 한라산 서부지역의 지형이 산방산을 중심에 두고 오른쪽으로는 마치 용의 머리가 바다로 뻗어 나온 듯 용머리 해안은 우백호가 돼 북서풍을 막아주고, 왼편에는 군산의 서쪽 능선을 타고 박수기정이 좌청룡이 돼 동풍을 막고 있어 화순포는 둥글게 만을 형성하고 있어서 항해하는 배들의 아늑한 피난처가 되고 있다. 또 남쪽으로는 형제섬이 안산으로 남태평양의 파도를 막고 있어 화순리 해안은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 피항지로는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고래로 범천포 해안은 늘 황당선, 이양선, 미변선이 자주 나타나므로 산방연대를 비롯한 이웃 흑로포(금물포:사계), 모슬포 해안의 봉수와 연대는 바쁘기 그지없었다, 사실상 제주도 전 해안에서는 중국 상하이나 대만→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항로의 중간 지점이므로 한라산 서쪽 해안과 남쪽 해안은 표류자와 표착선이 빈번하게 오갔다.

△프랑스 실종자를 찾다가 온 모슬포 

19세기에 제주도 화순포(범천포)와 모슬포 등 남부 해안에 표착한 외국배들이 많았다.

1846년(도광 26, 조선 헌종 12) 2월 4일 오후 4시에 화순포에 미변선이 정박했다. 이 배는 지난 2월 초1일 강정포에서 표착한 외국배였는데 머리 두건으로 보아 청나라 배로 추측하였다. 이 외국배는 제주도 강정포를 출항해 대양에 이르러 갑자기 세찬 비바람을 만나서 작은 급수선이 유실되자 물이 없으면 항해할 수 없으므로 다시 화순포로 급하게 정박했다가 서쪽 바다로 떠났다.

또 1851년 3월 24일 미변선(프랑스 배)이 모슬포 금물포(사계 포구) 해변에 표도하였다. 이 배는 프랑스인 실종자를 수색하는 프랑스 배였다. 중국 상해현에서 공문을 가지고 청나라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탔다가 실종된 사람을 찾으면서 이곳까지 이르렀는데 배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양식과 찬을 시급히 요청한다고 하여 조선의 관리는 법대로 지급했다. 이 프랑스 배에는 청나라 사람 11명과 프랑스인 23명이 탔고, 소지한 물건은 각각 조총, 환도, 일용품이며, 배의 원심력을 위한 돌무더기를 싣고 있었다. 배의 길이는 어림잡아 20발(한 발은 어른 키 길이), 너비 7발쯤 되었고, 이물과 고물이 평평하고 낮으며, 배의 색깔은 푸른색을 칠하고 있었다.

조사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프랑스 뱃사람들로서 1851년 3월 19일 청나라 강남성 상해현에서 출발하여 동북방으로 항해하다가 24일에 이곳(금물포)에 도착하였는데 바다에서 실종자 20명을 찾고 있었다. 이 실종자들을 찾는 배는 프랑스 상선으로 3월 초3일에 청나라 광동 향상 항구에서 배를 타서 상해현으로 가는 항로에 바람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20명 중 7인은 삼판선 4척 가운데 한 조그만 배에 타고 전전하다가 풍랑으로 상해 서남쪽에 와서 물에 떨어졌다고 하므로 상해현의 공문을 가지고 13명을 찾으려고 바다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이 배는 프랑스 소속으로 민체니가 정령관이고 상해현 포도관 유건진 소관의 관선이라고 했다. 이 배는 프랑스 포경선 실종자를 수색하던 중 식량과 땔감이 떨어져서 금물포에 표도한 것이다. 당시 상해 주재 프랑스 총영사는 드 몽띠니였는데 1847년 1월 20일 상해로 부임하여 1853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샤를르 달레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 포경선 한 척이 조선 연안에 좌초하여 선원들이 관헌에게 잡혀 매우 위험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이때 드 몽띠니는 용감한 선원이 승선한 중국인 소유의 서양식 배를 세내어서 두 명의 영국인을 데리고 프랑스 선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러 가서 성공했다고 한다. 아마도 실종자들은 선박 좌초 때 발생한 프랑스 포경선의 선원이었을 것이다.

△은전을 약탈한 홍모인 해적   

1867년 10월 17일 오후 8시쯤에 청나라 상선이 모슬포 앞 바다에 육지와 3마장 되는 거리에 표착했다. 복식으로 보아 청나라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18일 새벽 6시쯤에 파도가 조금 가라앉은 틈을 타 대정군수는 작은 배로 통역과 함께 그 배로 들어가서 심문할 사람 5명을 데리고 육지에 내리고는 먼저 그들에게 미음을 제공하고 이곳에 표착한 이유를 물었다. 상인이 대답하기를 "자신들은 청나라 사람들로 산동성 등주부 황현 사람 24명이 한 척의 배를 타고서 올해 7월 25일 황현 용구 항구에서 출항, 같은 달 28일 이진현 영화점에 도착하여 오조(붉은 대추를 삶아서 연화로 훈제한 것)를 싣고 8월 12일 강남 상해현 오송항에 이르러 은전으로 바꾸고는 9월 16일에 출항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22일 갑자기 바다에서 강도를 만나 배의 실은 은전과 옷가지 등의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바다에 떠다니며 밤을 지샜으며, 다음날 갑자기 서북풍이 급하게 불자 배는 조류에 맡기고 떠돌다가 급기야 10월 17일 이곳(모슬포)에 표도하였다"라고 했다. 대정군수가 해상에서 만난 도적에 대해서 다시 물었더니 "도적 무리 수십 명이 갑자기 배에 올라 각기 총과 칼을 가지고 방어를 못하게 앞에서 위협하자 배 안에 있던 선원 셋 중 한 명은 오른쪽 어깨에 칼이 찔리고, 다른 한 명은 왼쪽 발에 탄환을 맞았으며, 또 한 선원은 탄환을 맞은 손이 완치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별 탈이 없다"고 말했다. 다시 어떤 사람들이었고, 어떤 배였느냐? 라고 물으니, "큰 배 1척에 종선은 10여 척으로 도적의 수는 알지 못하며 도적은 홍모이고 배 또한 홍모의 배(서양배)였다."고 했다. 

바다 강도면 해적을 말한다. 중국은 긴 해안선 덕분에 그 연안에는 늘 해적들이 우글거렸다. 특히 광동의 동해에는 오래전부터 해적들이 있어서 신출귀몰하게도 수시로 나타났다가 금방 한바다로 사라지곤 했다. 18세기말 가경 연간만큼 해적들이 극성을 부린 적은 없었다. 모슬포 앞바다에 표착한 청나라 상선을 노린 해적이 홍모인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원래 홍마오는 즉 붉은 머리 사람인 네덜란드인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네덜란드인을 포함하여 영국인, 독일인 모두 머리색이 붉은 갈색을 띠었기 때문에 이들을 구별없이 홍마오라고 불렀다. 이 머리색은 게르만 혈통의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특별한 색이었다(K.F.Neumann, 2024).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홍모인 해적들이 노린 것이 은전이라는 사실이다. 은(銀)은 16세기 이후 중국이 무역으로 대량 확보하고 있었다. 대항해시대 이후 일본,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업 투기꾼 등이 중국의 비단과 찻잎을 구매하는 동시에 금과 은의 금리 차액을 노리고 은으로 중국의 금을 교환해 갔다. 이유를 보면 명나라 때만 해도 금과 은의 가격 차이는 8대 1 정도로, 세계 평균인 16대 1의 비해 절반의 차액이 발생했다. 이들은 여기서 놀라운 수익률을 알았고 금리 차를 이용하여 은으로 금을 교환해 갔다. 문제는 금과 은이 보유지가 편중되었는데 유럽은 금이 많아지고, 중국은 은이 많아진 것이다. 역시 아무리 좋은 것도 한쪽으로 쏠리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특히 유럽에 은이 부족해지자 19세기 막대한 경제력이 있었던 영국도 파운드로는 중국 찻잎이나 비단을 구입할 수 없었기에 결정적인 마지막 한 수를 노린 것이 아편을 팔아서 중국의 은을 되찾아오는 방법이었다. 왜 홍모인 해적들이 은전을 노렸는지 이유가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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