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면 씨름대회 항일운동 의미 재조명 토론회 개최
"우연한 싸움 아닌 일본 어민 침략 등에 대한 저항"

1927년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성산면 씨름대회 항일운동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앞으로 과제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지난 9일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농수축경제위원회, 위성곤 국회위원실이 주최, 주관한 가운데 성산포수협 어업인복지회관 대회의실에서 '제주 성산면 씨름대회 항일운동 재조명 정책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토론회는 지난 1927년 5월 16일 성산면(당시 정의면)에서 개최된 씨름대회가 단순한 민속행사를 넘어 항일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서 가지는 상징성과 공동체 정신을 조명하기 위한 자리이다. 1927년 씨름대회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민족 정체성을 드러낸 사례로 역사적 가치를 재해석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당시 사건의 독립운동적 성격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이 부결됨에 따라 재신청을 위한 전문적 연구와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보고 토론회가 마련됐다.

성산포 씨름대회는 1927년 5월 16일 성산면청년회 주최로 고성마을 씨름장(속칭 소금막)에서 씨름대회가 열리던 중 풍랑을 피해 성산포항으로 피항을 온 일본인 선원 200여 명이 이곳에 몰려와 일부 선원이 선수로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일본 선원들은 도민 선수들에게 차별적인 언행과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고, 경기에 패하자 재경기를 요구하며 각목과 죽봉을 들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일본과 제주 청년 간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앞서 이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일본 어민들이 성산포 근해에서 불법 조업을 자행했고, 더욱 극심해진 민족에 대한 차별로, 청년들의 항일정신이 분출되면서 물리적 충돌을 낳았다.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성산포 소요 및 상해 치사사건'으로 규정해 경찰력을 출동시켰다. 이 사건으로 일본 선원 1명이 숨지고 7명이 부상당하자, 52명의 성산면 청년들은 경찰에 체포됐고, 이 가운데 일부는 광주지법에서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싸움을 유발한 일본인 선원들에 대해선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날 주제 발표를 맡은 박찬식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은 19세기 말 일제의 어장 침탈과 성산포, 일제 강점기 성산포 상황, 1930년대 해녀조합 횡포에 대한 투쟁, 재판 결과, 그 시기 신문 기사 등을 살폈다.

박 관장은 이를 토대로 "일본 검찰과 법원이 성산포 씨름 사건을 왜 '소요 및 치사 사건' 즉 단순 폭행 사건으로 규정했는지, 사건을 주도한 고은삼과 송세훈의 무죄 선고를 통한 항일 은폐 의도는 없는지 등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라며 "우연한 싸움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어 온 일본 어민들의 침략과 폭행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서 항일투쟁으로 볼 수 있다. 성산포 씨름 사건 검거자 명단을 보면 성산포 중앙청년회, 수산청년회, 오조청년회, 성산포청년회 등 각 청년회가 조직적으로 이 투쟁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박관장은 1940년 부산학생 항일운동 사례도 들었다. 이는 그해 11월 제2회 경남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의 편파 판정에 항의해 동래고보 학생 등 1000여 명이 거리 시위를 벌이고 일본군 관사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 이 의거로 지금까지 13명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박 관장은 성산포 씨름대회의 경우 지역 구술 자료 확보, 신문 기사 자료 집대성, 판결문 등 행형 자료 행간 파악, 종합자료집 발간 등 추가 자료의 발굴 조사 연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실패 원인에 대한 명확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또한 성산읍 주민이 중심이 돼 제주도민과 함께하는 기념행사 개최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일제는 당시 단순한 '폭력사건'으로 치부했지만, 성산면 씨름대회 항일 의거의 정신은 우도·구좌 지역으로 확산돼 1932년 해녀항일운동과 추자어민 투쟁으로 이어지는 제주지역 항일운동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기점으로 역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단순 폭력사건으로 왜곡 기록되어 항일운동으로서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재해석의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양홍식 제주도의원(농수축경제위)이 좌장을 맡아 진행된 종합토론에서는 강길웅 제주MBC PD, 정순호 전 성산읍 행정동우회 회장, 고기봉 전 오조리장, 김효선 제주보훈청 보훈과장 등이 토론에 나섰다.

고기봉 전 오조리 이장은 "성산포 씨름대회 사건은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맞선 제주 민중의 집단적 저항이자 민족적 자존을 지키기 위한 항일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조직적·계획적'이라는 독립운동의 엄격한 기준에만 얽매이지 않고 일제 강점기 민중의 자발적 저항과 실질적 항일의지 준비를 비밀리에 움직이다  밤에 일본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사망한 뒤, 시체도 없이 갈중이만 가족에게 전해져 시신도 없이 관에 옷 하나만 담아 장례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해 징역형을 선고받은 47명은 98년이 지난 지금까지 폭력범 등 범죄자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토론회에서 좌장을 맡은 양홍식 도의원은 "이번 토론회를 통해 성산면 씨름대회의 역사적 가치를 올바르게 재조명하고, 독립유공자 서훈 등 제도적 보완과 정책적 지원이 이어질 수 있도록 도의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