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41. 제주 해안에 표착한 열강의 배 <2>
상하이 노선상에 있는 화순항
동아시아 허브 상하이 오송항
부산-나가사키 해저전선 개통
이번에는 미국의 공선이 화순포에 왔다. 변방의 파수꾼들은 여전히 분주할 뿐 이들이 왜 화순포에 나타나는지를 알지 못했다. 동아시아 정세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지만, 이곳 제주에서는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일본, 미국 배들이 왜 점점 자주 오는지 이유를 제대로 알기에는 세상 물정이 어두웠다.
1883년 10월 27일 오후 6시에 동남쪽 바다로부터 1척의 미변선이 화순포 앞바다 10리쯤 되는 거리에 돛을 내리고 정박했다. 대정현감 김규임(金圭任)은 두 통역사를 데리고 작은 배를 타고 가서 선체를 살펴보았다. 배는 앞뒤가 평평하고 갑판의 길이는 50파(어른 양팔 벌린 길이), 너비 7파이고, 돛대는 3개를 꽂았으며 가운데는 연통을 달고 있었고 국기를 보니 미국배였다. 화순포에 피항해 온 이 미국배에는 미국인 2백명, 청국인 7명, 일본인 5명이 탄 공선(公船)이었다.
이 배는 올해 10월 초9일 청국 상하이현 우쏭(吳淞)항구에서 출항하여 20일 일본 나가사키에 갔다가 다시 25일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조선의 인천 항구로 가던 중 북풍이 크게 불어 배를 제어하기가 어려워 잠시 화순포 앞바다에 정박한 것이었다. 선주의 이름은 백견(白見)이고, 앞으로 서로 화호(和好; 수교)할 곳(국가)이니 다른 것은 알 것이 없다고 하고는 바람이 그치면 곧 출발한다고 말했다. 대정현감은 수교를 맺었다는 말을 듣고 후하게 대접한다는 의미로 소주 3백 잔, 생닭 5마리, 계란 2백 개를 아울러서 음식물을 제공하니 그들은 선뜻 받으면서 고마워했다. 미국 공선은 화순포 앞바다에서 닷새를 선상에서 머물다가 바람이 잦아들자 12월 초1일 아침 6시에 닻을 올리고는 서대양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순식간에 물마루 너머 사라졌다.
△국제도시로 떠오르는 상하이
아편전쟁(1840~1842) 후에 맺은 난징조약과 1843년 맺은 호문(虎門) 조약으로 청나라는 5개 항구 중에서 광저우(廣州)를 제외한 상하이(上海), 닝보(寧波), 푸저우(福州), 샤먼(廈門) 항구들은 모두 외국인에게 통상, 거주, 영사관 설립을 개방했는데, 상하이는 1843년 11월에, 닝보는 같은 해 12월에 개방했으며, 푸저우와 샤먼은 1844년 6월에 개방했다. 그러나 4곳의 항구와는 달리 광저우만은 시민들이 완강히 반대하는 바람에 단지 서양인들이 원래의 상관(商館) 구역에만 거주하는 것에 동의했다. 광저우 시민들의 주장에 따르면, "조약(1842년 난징조약)은 광저우 개방을 명기했지만, 서양인이 도시에 들어와 거주할 수 있다고 명기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광저우 시민과 영국인의 충돌로 비화하였고, 광저우 시민들은 아편전쟁 시기에 다른 도시의 주민들보다도 영국인으로부터 더 모욕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편전쟁 후에 광저우는 대외무역 일부분을 상하이에 빼앗기는 고통을 당했는데 이유인즉슨 상하이가 차와 비단 생산지와 더욱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상하이는 중국 내 지역 간 무역의 중심지로는 대외무역액에서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상하이가 오지(奧地)로 통하는 양쯔강 하구에 위치하고, 그리고 장쑤나 저장 등의 생산물이 풍부한 강남 지역을 배후에 두고 있어 상하이는 1843년 개방되자 불과 10년 사이에 이미 광저우를 넘어서는 대외무역량을 달성했으며,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이어 동남아시아의 제2의 무역항으로 부상했다. 상하이가 광저우 무역을 앞서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지리적인 이점 때문이기도 했다. 1840년대 후반부터 광둥이나 광시에서 비밀결사체인 천지회의 무장봉기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광저우 일대의 분위기가 나빠진 것도 상하이에는 좋은 상황이 되었고, 상하이의 무역 수출입 규모의 성장도 놀랍게도 빨랐다. 상하이의 중요한 항구로 우쏭항이 있었는데 우쏭은 상하이시 북부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황푸강이 양쯔강으로 합류하는 하류 지점에 있어 상하이 노선의 중심 항이 되었다.
상하이는 무역뿐만 아니라 점점 동아시아에서 교통의 중심지가 돼 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의 P&O 기선(Peninsular & Oriental Steam Navigation Co.)이 1850년에 상하이와 홍콩 사이 정기 항로를 개설하고 기존의 런던과 홍콩 사이에 연락망을 상하이까지 연장했다. 이어서 프랑스의 프랑스제국우편선(Services Maritimes des Messageries Imperiale)이 1861년에 사이공과 상하이를, 또한 1863년에 마르세유와 상하이 사이에 정기 항로를 개설하여 동남아시아 및 유럽대륙과 상하이를 직접 연결했다.
그 이후 1867년에는 미국의 태평양 우편선(Pacific Mail Steamship Co.)이 샌프란시스코와 홍콩 사이에 항로를 개설하고 그 가운데 요코하마와 상하이 등을 기항지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 노선을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P&O 기선이 1859년 일본의 개항과 거의 동시에 상하이와 나가사키 사이에 취항했고, 이어서 1864년에 상하이와 요코하마 사이에 정기 항로를 개설하였다. 또한 프랑스 제국우편선은 1865년에 상하이와 요코하마 사이에 정기 항로를 열고, 기존의 상하이와 마르세유 노선과 연락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태평양우편선은 앞서 말했듯이 1867년에 샌프란시스코와 홍콩 사이에 항로를 개설하는 데 있어서 요코하마와 상하이 사이에 그 지선(支線)을 개설했다.
하지만 상하이 정기항로를 운항하는 배들은 우편선뿐만 아니라 열강의 군함이나 각 나라의 상선들도 이 시기에 상하이가 동아시아의 허브로서 상하이 노선을 운항하고 있었다. 상하이 노선의 대표적인 군함으로는 1853년에 미국의 페리 함대가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왔으며, 또 그다음 해에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기 위하여 내항한 스털링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도 마찬가지로 상하이에서 출항했다. 상선들은 이미 1850년대 초에 상하이를 동남아시아 제2의 무역항으로 여겼으며, 1857년에는 연간 상하이항 출입항 수가 1천 척에 육박했고, 1850년 말이 되면 일본의 개항과 더불어 청나라 안팎의 정세에 따라 선박의 출입항 수가 더욱 증가하여 1866년이 되면 마침내 3천 5백 척 가까이 되었다.
상하이 출입항 수와 1859년 개항한 나가사키의 외국 상선 출입항 수를 비교해 보면, 나가사키의 경우에는 1860년 3월 이후 10개월 동안에 대략 90척 정도였으며, 1869년 한 해에는 265척이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이처럼 나가사키에 입항한 배들은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 등의 석탄 수출선으로 일본에서 싸게 사들인 석탄을 증기선이 많이 정박하는 상하이로 운반하여 배의 연료로 비싸게 팔기 위해서였다.
상하이는 1850년대부터 1860년대에 세계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교통과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1870년대에 들어서면 상하이를 중계지로 나가사키와 유럽 사이의 해저 전신 케이블이 부설되자 교통의 '허브'역할로써 상하이가 한층 강해졌다(劉建煇. 2020).
△인천으로 가는 미국 공선
강한 북풍 때문에 화순포에 일시 정박했던 미국 공선은 돛이 세 개 달린 증기선으로 승선 인원은 2백 12명이었다. 외국의 돛대 세 개짜리 대형 함선의 승선 인원은 3백여 명, 돛 두 개짜리 군함에는 2백여 명, 화륜선에는 80~90명, 삼판선 큰 배는 60~70명, 작은 배는 20~30명이 탄다고 한다(魏源, 2021). 미국 공선의 임무는 알 수 없지만, 기항지가 인천이라는 사실은 큰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1876년 2월 2일 불평등하게 체결된 조일수호조약(강화도 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 이후 조선은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뒤늦게 세계 상황을 깨달아 국제적인 상황에 발맞춰 서양 여러 나라들과 조약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첫 번째 대상국이 미국이었다. 위정척사의 유림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1881년 말부터 미국과의 수교를 준비했지만 조선 대신 청나라가 조선의 대리인이 되었고, 미국과의 협상도 조선의 관리가 아닌 리홍장이 진행하여 바야흐로 1882년 5월 조선측 전관 대관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던 신헌과 미 해군 제독 로버트 W. 슈펠트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이계형, 2018). 1883년 9월 16일 부산과 나가사키간에 해저 전선이 착공돼 이듬해 2월 28일 개통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