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자욱한 금능바다. 섬은 안개에 싸여 고요하다. 센바람이 올 수도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짐을 싸는 이들이 보인다. 인근 도서관에서 모임이 있어 조금 일찍 도착해 바다를 둘러싼 길을 걸어본다. 바다의 색깔과 대조적으로 인근 식당과 가게의 불빛들은 신도시를 연상케 한다. 고양이 한 마리 가게를 낀 담벼락을 유유히 기어올라간다.  새끼고양이들이 "이야오옹" 울부짖으며 뒤를 따른다. 오일장 갈 때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나도 데리고 가. 나도 데리고 가"라며 발버둥을 쳤던 둘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날은 꼭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친 평상에 앉아 섬의 실루엣을 손가락으로 그려본다. 금방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형태만 갖췄다고 섬이 되는 것은 아니니 섬세한 관찰이 필요하다. 섬의 느낌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뭍으로 넘어온 갯강구들이 부지런히 구멍을 찾아 움직인다. 생김새가 똑같아 금방 들어갔던 이가 또 나오는 것처럼 정신이 없다. 들고 날고를 반복하는 모습이 식구 하나를 잃어버린 듯하다. 검은 돌들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다. 비 오는 날 빛나는 것들이 있다. 토란, 검은 고무신, 담 위의 호박, 축음기, 찢어진 우산 같은 것이다.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나희덕 시 「비 오는 날에」 전문)

웬만한 비는 맞으면서 뛴다. 머릿결이 푸석푸석 해지는 게 두렵지만 그 정도는 견딜만하다.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 들게 한다면/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는 고백이 감사하다. 비 오는 날은 누군가와 가장 가까이 살을 맞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우산 아래 둘이 서 있는 풍경이 편안하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이 비 오는 날에/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는 표현에서 솔직함을 본다. 세상 부러운 것 없이 다 해 줄게 하던 사랑도 비에 젖은 누군가를 온전히 막아주기에는 힘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단히 노력하는 사랑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랑을 논하기엔 너무 고단한 세상이다. 뭔가 한시름 놓는가 싶으며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지는 고단함이 반복되고 있다. 며칠 뉴스를 보는 게 편안하다 싶더니 또다시 뉴스를 덮게 만든다. 그래서 휴일 내내 영화 속에 빠져든다. 스크린이 진실과 대면하는 것을 막아서게 한다는 논리가 있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진실 하나를 캐기 위해 스크린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나를 본다. 나만의 심기일전 방편이다. 

영화 '노트북'은 말랑말랑한 멜로 드라마다. 노아(라이언 고슬링 역)와 앨리(레이첼 맥아담스 역)는 시골마을에서 만나 뜨거운 여름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서로 다른 가졍 환경은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그리고 재회하게 되는데, 그땐 이미 엘리에겐 약혼자가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물론 둘은 인생의 동반자로서 함께 여생을 보내게 된다. 나이가 들어 앨리가 치매가 생겼을 때 노아는 노트에 글을 적어가며 앨리의 추억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영혼을 바쳐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입니다"를 보여주는 영화다.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영화가 필요한 만큼이나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힘을 가질 때가 있다. 비 오는 날,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할 때, 우산을 접고서라도 달려가고 싶은 데가 있는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괜스레 비를 막고 울고 있는 이가 있다면 우선 구해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과대 포장된 은유이기에 현실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따져보자. 누군가의 우산이 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고장난 우산을 고쳐서 쓸데없이 비에 젖는 일만이라도 막아야겠다. 미야자와 겐지의 시처럼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건강한 몸"을 지니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야채 조금"을 먹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낼 것이다. 비에도 지지 않고, 더위에도 지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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