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43. 페이거니즘 <1> 

관념은 감각지각의 인상들 
유럽중심주의 1492년 이후
박해받는 종교에서 국교공인

△유럽중심주의
데이비드 흄은 인상과 관념을 구분한다. 그가 말하는 인상은 강렬하고 생생한 지각으로서 시각과 청각과 같은 직접적인 감각 지각들은 외적 지각의 인상이며, 그리고 감정이라고 부르는 즐거움이나 증오와 같은 심리 경험들은 내적 지각의 인상이라고 한다. 나아가 흄은 외적, 내적인 인상을 관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기억이나 상상력이 만드는 어떤 이미지들의 총합이 곧 관념이 된다. 따라서 모든 관념은 그런 인상의 작용 없이는 절대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다. 그 경험된 인상들이 어떤 생각의 형체들을 만들어내며, 추위, 배고픔, 고통 등의 지각과 평안과 불안, 고독 혹은 기쁨과 공포 따위의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결합해 대상에 대한 어떤 관념을 만들어낸다. 삶은 몸의 실체적 경험이며, 그 경험이 생각을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의 관념으로써 포이에르바하의 말대로 "인간 정신의 꿈이다. 그러나 우리는 꿈속에서도 무(無) 또는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곧 현실의 나라에 있다." 모든 신성한 것들은 우리가 꾸는 환상일 것이다. 

유럽중심주의란 서구 기독교 사회의 대표적인 관념이다. 우리의 근대는 이 유럽중심주의라는 일방적인 파도를 맞으면서 시작됐고, 지금은 그것이 하나의 큰 권력이 됐다. 제임스 M. 블로트는 역사학에서 유럽중심주의 이론을 다음 네 가지로 구분한다. 

① 종교:유럽인들은(즉 기독교인들은) 진정한 신을 섬기며, 이 신은 유럽인들이 전면에 나서도록 내내 이들을 인도하고 있다. 

② 인종:백인들은 유전적으로 다른 인종의 인간 집단들보다 우월한 특성을 갖고 있다.

③ 환경:유럽의 자연환경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우월하다. 

④ 문화:유럽인들은 아주 오래전에 비길 데 없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문화를 창조해냈다. 

유럽중심주의는 이 네 가지 원리를 가지고 지금까지 여러 가지 조합들이 만들어졌다. 19세기 초만 해도 역사학자들은 종교적 설명이 확실히 우세했지만, 인종·환경·문화도 결국 신의 도구라는 식으로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중에 종교에 기댄 역사학자들은 소수파가 됐고, 인종주의 또한 다시 버림을 받게 되면서 현재의 유럽중심주의 역사는 환경과 문화라는 두 개념을 가지고 버티고 있으면서 세계를 정복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M.블로트는 이 주장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유럽이 환경이 다른 지역 환경보다도 더 좋지도 않을뿐더러 생산량이 많지도, 더 쾌적하지도, 교류나 교역에 더 적합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다른 면에서 더 뛰어나지도 않다고 한다. 유럽의 역사를 돌아볼 때 유럽문화가 남들보다 우월한 특성 따위는 없었고, 유럽의 발흥은 이런 유럽중심적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 부흥이 순전히 신세계의 자원을 손에 넣는 데 다른 구세계 문명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유럽의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1492년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에서 엄청난 자원을 강점하면서 상인-자본가 계급과 그 지원 세력들이 정치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동시에 직간접으로 여러 방식(약탈, 동인도회사들)에 의해 유럽인들이 바깥 세계에 진출함으로써 유럽의 경제를 완전히 바꾸어버린 결과였다. 

16세기에 등장한 유럽중심주의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유럽의 우월성이 식민지배의 성공으로 확인됐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우월성이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식민주의는 16세기를 넘어 몇 세기 더 지나면서 계속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지배할 정도가 됐다. 유럽중심주의에는 나름의 역사학뿐만 아니라 지리학도 있었다. 이 지리학은 세계적 규모에서는 유럽 중심적 확산주의가 된다.

△평등주의, 기독교 확산의 장점 

탄압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전통 종교와 신흥종교를 물리치고 지배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 기독교는 현실 세계의 어려움으로부터 개인을 구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해 큰 성과를 거뒀다. 

둘째로 기독교는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맞아 혼란에 빠져있던 로마인들에게 안정감과 소속감을 줬다. 

셋째, 기독교의 확산에 이바지한 요인으로는 박해에 맞서서 기독교인이 보여준 용기였다. 그들의 박해는 오히려 기독교의 성장에 이바지했다. 

또한 기독교는 특정 계급이나 남자에게만 가입을 허락했던 다른 종교와는 달리 유대인, 그리스인, 노예나 자유민,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문호를 개방해 모든 기독교인은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그리고 기독교 교회는 평등을 중시했지만 동시에 규율과 질서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정신 때문에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했던 기독교가 전 인류를 포함하는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배영수, 2000). 

△로마제국 국교가 된 박해받던 종교 

기독교는 하나의 신인 유일신을 믿지만, 로마의 시민들은 여러 신을 믿고 있는 다산교도였다. 이런 종교적 세계관은 유대-기독교의 근본주의적인 사고를 반영했다. 그래서 '이교'라는 용어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인류를 이분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기독교의 언어체계가 되면서, 이교도는 개종시켜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오로지 자신들이 믿는 신 이외에 다른 신을 믿는 것은 십계명에 나온 대로 '우상숭배'라 해 금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기원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306~337)에 의해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후에는 이교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더욱 분명해졌다. 7세기에 다른 유일신교인 이슬람이 발흥하자 그 이슬람교도 어쨌든 이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이교가 아닌 것도 아니었다.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들은 복잡한 전례, 무절제한 성상, 그리고 성인성녀를 숭배하는 로마 가톨릭을 이교로 보기도 했다.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기독교 용어들은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라틴어가 주류를 이루는데 '파간(pagan)'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라틴어 파가누스(paganus)는 파구스(pagus), 즉 지방거주자(시골에 사는 사람)를 의미하지만, 이교도, 즉 비기독교도를 뜻하게 됐다. 독일어 '하이데(Heide)'나 영어 '히던(heathen)'등도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지방거주자'를 뜻하는 '파가니(pagani)'라는 말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지역에서 종교적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의 알리에니(alieni)'를 외래 종교를 믿는 기독교도들을 의미하게 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용어의 개념이 달라져 2~3세기가 되면 파가누스는 로마군인들 사이에서 '민간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고 한다. 그 당시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을 밀레스 크리스티, 즉 그리스도의 군인들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군대에 복무하지 않고 민간인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을 파가누스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이선 도일 화이트, 2023).

서기 380년경 기독교가 도시에 자리를 잡는 동안 지방거주자들은 낙후된 그들의 전통적인 신을 계속해서 숭배했기 때문에 파가니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기독교적 중세문화와 정신세계가 육성되는 바탕으로, 로마제국의 법률, 그리스 교양, 발흥하는 기독교라는 세 가지 요소와 더불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켈트족과 게르만족, 그리고 슬라브족이라는 민족들도 거기에 포함해야 한다. 아무튼 기독교와 고대의 정신적 유산을 받아들인 이들 민족은 '아만족'의 상태에서 벗어나 세계사적 발전의 계승자이자 주인공이 됐다(한스 J. 슈퇴리히, 2008). 사실상 이교도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어디서나 자신들의 공동체를 비기독교인들과 구분하는 파가누스라는 말을 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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