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을 주문하라는 문자가 여러 군데서 왔다. 처음에는 필요해서 주문했고 그 다음부터는 인정으로 주문하다 보니 단호박 장사를 해도 될 만큼 상자가 쌓였다. 할 수 없이 또 단호박 먹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갖다 주겠다는 문자를 보낸다. 지인 여럿이 미안한 표정으로 감사히 먹겠다는 답이 와서 일일이 나눠주는 일까지 마치니 진이 다 빠진다. 그래도 뭔가 나눠 먹었다는 기쁨이 있다. 

미니 단호박이라 하니 다들 어떻게 생긴 호박이냐 자꾸 묻길래 "요만한 거야."라며 사진을 찍어 보냈다. 눈치 없게 "예쁘당"이라는 애교 섞인 답이 돌아왔다. "농사지어?"라는 물음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애교로 넘어갔을 것을, '생각 좀 하고 물으라'는 원망의 소리를 속으로 하는 걸 보고 나도 누군가의 부탁을 기쁘게만 받아안지는 않았구나 싶다. 

사실 나는 호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먹은 호박 된장국은 배춧국이나 무국보다 못했고, 해산 후 먹은 호박즙은 서러웠고, 최근에야 맛을 알게 된 찐 단호박은 목이 멘다. 그래도 밤맛 또는 고구마 맛을 묘하게 섞은 맛이 신기해서 몇 조각 먹어보고는 인기 간식이겠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다들 단호박 농사에 뛰어들었는지 단호박 풍년이란다. 말이 풍년이지 변덕스런 기후와 벌이 날아들지 않아 예년에 비해 25% 정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는 보도가 있다. 단호박 상자를 열어보니 얽고 설킨 녀석들이 꽤 있다.  

밥을 먹다가 문득문득 목이 멜 때가 있다
마음의 골목 맨 끝에
우두커니 떠오르는 집 때문이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도
머릿속 저 어딘가에
자꾸 불을 켜는 곳이 있다
아직도 그 집을 떠나가지 않은 슬픔 때문이다 

꺼질 듯 꺼진 듯,
식구들을 비추기에도 힘들더니만 

미련이 남아서일까
후드득,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면
가슴속에 남아 깜박거리는
저 등불 때문에 목젖이 아프다 
(권대웅 시 「호박등」 전문)

고구마나 호박을 먹다가 목이 멘 적은 있지만 "마음의 골목 맨 끝에 우두커니 떠오르는 집" 때문에 목이 멘 적이 있나 싶다. 따지고 보면 내 삶이 지쳐 여러 번 목이 메었을 것이고, 가까운 누군가가 겪는 힘든 사연을 듣다가 식사 자리가 답답했던 적은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으니 다 지나갈 일이라며 영혼 없는 덕담을 나누었을 테다. 엊그제 본 영화에서는 계란을 먹다 목이 메어 실제로 목을 멘(실제로는 음독자살이다) 사연이 나왔다. 이렇게 말하면 실없는 영화가 돼버리는 것 같아 미안하다. 너무도 실해서 실제로 보면 목이 멜 것이다. 

'먼지로 돌아가다'는 제목만 보았을 때는 초월적 영성을 시사하는 종교영화인 줄 알았다. 1983년생 리뤼준 감독의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 이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다 지나가도 오래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 제비집, 당나귀, 밀알로 손등에 새긴 꽃무늬 등의 여운이 깊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보고 감상문이랍시고 '인생만사 새옹지마' 라는 표현을 썼다면 그 사람과는 오래 말을 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제72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공식 초청작이었던 영화, '먼지로 돌아가다'는 국 서북부의 어느 한 농촌을 배경으로 중국 농촌의 빈곤과 재개발 등의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국제영화제에서의 호평과 달리 중국에서는 상영금지령이 내렸다니 한국의 88올림픽 때처럼 시진핑 시대의 중국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민낯이 있나 보다. 전세계 신자유주의 흐름에 맞춰 중국도 초고속 성장의 면면을 보여주고 싶은데 농촌의 풍경은 그 의지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두보의 시처럼 취한 눈으로 보아야 알게 되는 진실을 덮고 싶은 것이다. 

望遠歲時同(망원세시동) : 먼 곳 바라보니 시절의 풍경은 예전과 같구나.
弟妹悲歌裏(제매비가리) : 동생과 누이를 슬픈 노래 속에 생각하고
乾坤醉眼中(건곤취안중) : 하늘과 땅을 취한 눈으로 바라보나니
兵戈與關塞(병과여관새) : 전쟁과 타향살이에
此日意無窮(차일의무궁) : 이 날 이 슬픈 마음은 끝이 없구나.
 -두보의 시, 「구일등재주성(九日登梓州城)」 부분

영화의 주인공 유테는 당나귀 한 마리와 누군가 버리고 간 빈집에 살고 있는 노총각이다. 가족들에게는 '좀 모자란 넷째'로 통한다. 어느 날, 가족들의 주선으로 구이잉이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형식상 중매이지만 200위안을 주고 사온 매매혼이다. 구이잉은 생식이 질병으로 대소변을 가릴 수 없고, 출산도 불가능한 여성이었다. 구이잉은 낯선 환경에서 자주 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벌벌 떨다 잠이 들곤 하였다. 하지만 유테의 극진함으로 서서히 마음이 열리면서 둘은 더없이 좋은 친구 같은 부부가 된다. 정부의 시책으로 빈집은 헐리고 유테는 구이잉과 함께 새로 흙집을 지어 이사를 하고, 옥수수와 밀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아간다.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은 유테에게 인권침해를 일삼는다. 셋째형은 그에게 극빈층만 분양할 수 있는 아파트를 분양하게 해서 자신의 아들에게 양도를 강요한다. 대신 분양하게 해서 아들에게 물려준 셈이다. 마을에서는 지주의 아들이 'RH판다혈'이 모자라다며 유테의 피를 정기적으로 수혈하게 한다. 이 모든 걸 숙명인 듯 무심하게 받아안는 유테, 차가운 고구마를 먹은 듯 자꾸 목이 메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옥수수밭에서 늦게 까지 일을 하다 아내의 익사 소식을 듣는다. 구이잉은 밭에서 돌아오지 않는 유테를 찾아가던 중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익사하고 만 것이다. 

유테는 빚진 곡식도 갚고, 외상값도 갚고, 당나귀도 풀어준다. 그리고 삶은 달걀을 먹고 눕는다. 유테가 살던 집도 헐리고, 풀풀 날리는 먼지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도 머릿속 저 어딘가에 자꾸 불을 켜는 곳이 있다"면 "아직도 그 집을 떠나가지 않은 슬픔 때문" 일 것이다. 찐 단호박에 '먼지로 돌아가다'와 같은 영화를 보면서 슬픔에 목이 메는 경험도 더위를 숙연하게 이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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