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46. 강간, 제주 여신의 원혼
역사 없는 침략자의 성폭력
처녀의 원한은 신으로 환생
집단강간 기억 신화의 교훈
△쉽게 잊는 흑역사
강간이란 성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일종의 폭력행위, 성폭력이라고 한다. 강간의 중죄를 범하는 주목적은 그 원인이 다양하지만, 성욕 충족의 목적도 있으며, 여성에게 욕을 보임으로써 자기 힘을 과시하고, 욕구불만을 발산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
강간은 모든 문화권에서 일어난다. 인류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브라질의 아마존 부족 메히나쿠 여성들은 늘 강간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베네수엘라의 아노마뫼 부족은 강간을 당하지 않은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고도 추정한다. 여성은 여러 가지 조건상 약자의 위치에 있다. 이 세상에서 강간이 일어나지 않는 문화권은 단 한 곳도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전시에 여성은 더욱 치명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강간은 전시에 빈번하게 발생하며, 무력에 의해 점령지나 주둔지 군사들에게, 또는 침략자들에게 언제라도 성적 노리개가 될 수 있는 조건에 있다. 물론 침략지에서는 약탈, 강간, 기물 파괴, 절도, 강제 점거 등이 빈번히 일어난다. 800여 년 전 몽골의 징기스칸은 자신이 강점한 땅에 대해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가장 큰 기쁨은 적을 격파하고, 도망가는 그들을 추적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며, 그들의 가족들이 펑펑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와 딸의 하얀 배 위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여기에 전쟁을 승리로 끝낸 정복자의 모든 만행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전쟁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논리 아래에 있으며, 승자는 부와 명예, 그리고 역사적 기록을 거머쥐고 패배한 자에게는 치욕과 노예, 죽음, 패망을 선사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런 현실이 눈앞에 닥칠 때까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아무리 적이라도 인간이라면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그러나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4·3,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 조그만 눈을 돌리면 상상도 못 할 사건들이 넘쳐난다. 여성이 그 피해의 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신이 된 여성
여성의 수난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 일어난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제주도는 일본에서 가깝고, 몽골 시대는 일본과 남송 진출의 항로 선상에 있으며, 동서로 구로시오의 긴 해류를 따라 바타비아에서 나가사키까지 네덜란드 동인도 항로 선상에 있고, 일본으로서는 한반도와 류큐, 그리고 중국, 타이완, 필리핀을 아우르는 교두보가 되고 있다. 특히 제주도는 일본 대마도와 규슈지역과 가까워 쉽게 왜구들의 급수지나 식량 약 탈지가 되기도 했다. 제주도는 역사 이래 수많은 침략자, 표류·표착지, 죄인의 유형지, 왕족, 사대부, 관료 등 정치인의 유배지가 되기도 했다. 제주도는 사방이 물길에 열려 있어 섬의 숙명처럼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외세의 침략은 여성에게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 가운데 직접적인 사건은 왜구들의 해안 마을 급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은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예의지국이어서 여인들의 수난은 있었으나 알았어도 모르는 체해야 하는 것이 체통을 지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은 대표적인 가부장제 희생자였다. 수많은 역사 기록에서 여성의 피해사례는 나타난 바가 극히 드물고, 오히려 여성의 피해를 행실 불량으로 삼아서 남사스럽다고 노골적인 표현도 외면한다. 신분사회의 여성의 처한 사회적 대우는 그야말로 밑바닥 수준이었다. 물론 지난 시대를 되돌릴 수 없다. 지나간 주어진 신분사회를 어찌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교훈을 얻어야 한다.
사람이나 국가나 약자로 살아가기에는 힘에 부친다. 적어도 약자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국가는 국방체계를 높여 열강과 주변국 침략에 대비하고, 사람에게는 민주주의적 인권이라는 법적인 체계를 보장해 인간의 존엄함을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쁜 역사는 언제라도 반복된다.
제주 여신 중에 왜구들에 의해 강간당해 죽어서 신이 된 여신이 있다. 조천읍 신흥리 볼레낭 할망이 그 주인공이다. 민속학자 고광민 선생이 채록한 본풀이에 의하면, 여신의 성은 박씨이고 나이는 십오 세인데 파래를 캐러 바닷가에 갔다가 일본 낙배가 물을 길러 왔다가 그 아가씨를 보고 갑자기 범하려고 하자 아가씨가 놀라서 달아나다가 해안가 볼레낭 아래서 강간당해 죽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박씨 아가씨의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고자 당을 설립했다.
일본 낙배란 표현도 그렇고, 강간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지만, 모든 맥락에서 보면, 물길러 상륙한 왜구의 소행이 분명하다. 왜구들이 들어온 포구인 '왜포'라는 지명이나, 바로 인근 백사장에 방사의 표시로 다섯 개의 탑(거욱)을 세워 방비한 것만 봐도 직접적인 역사 기록은 없지만, 왜구의 침략에 의한 단편적인 기억의 전승인 것이다.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본향당신은 토산 한집이다. 이 토산 한집은 하님(인)을 데리고 해변가 올리소에 빨래하러 갔다가 부서진 배에서 내린 팔 다리가 부상당한 왜구들에게 쫓겨서 몸을 숨겼지만 끝내 일곱 명의 왜구(혹은 여덟 명)들에게 윤간을 당하자 치욕스럽고 억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원혼을 안 토산리 사람들은 토산 한집을 여드렛당 신으로 모시게 됐다. 일곱명의 왜구들은 부상당한 패잔병이고, 올리소라는 샘물가로 상륙한 것으로 보아 물을 찾으려 왔다가 빨래하는 여성을 보고 흑심을 품은 것이었다. 아마도 적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가혹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강간당한 여성은 심리적으로 매우 큰 고통을 겪는다. 그들은 굴욕, 수치, 두려움, 불안, 우울, 분노, 광분하게 된다. 강간당한 여성은 계속된 후유증에 시달려서 피해자들은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싫어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꺼리고, 남자와의 접촉을 피하며, 사회적으로 자신을 격리하며, 우울증에 시달린다. 강간은 현대의 여성에게도 매우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압박 속이 놓인다.
실제 근대사를 보면 1887년 가파도에서 거주하며 어획하던 일본인들이 모슬포에 상륙해 약탈한 사건은 일본과 외교 문제로까지 번졌으나 약소국이었던 조선 정부는 미미하게 처리했다. '가파도에서 전복을 잡던 일본 배 6척이 모슬포에 와서 정박한 뒤 배에 있던 일본인들이 제 마음대로 상륙해 포구의 민가에 뛰어들어 닭과 돼지를 약탈하고 칼을 뽑아 사람을 구타했습니다. 그 결과 집주인 이만송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포구의 주민 김성만, 정종무, 이흥복 등도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에서 일본어부 40여명이 달려나와서 포구의 기찰장 문재욱을 위협해 강제로 화해의 증표를 받아 내고는 곧장 가파도로 돌아갔습니다'고 했다.
한 사례만 보더라도 조선말기까지 왜구에서부터 근대 일본인까지 한반도 해안지역과 제주도는 일본의 영향력에 신음하고 있었지만 쓰러져가는 조선은 점점 일본의 식민지의 사슬 감아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