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47. 배수첩 <1>
이름이 없었던 조선의 여성
현모양처 여성 꿈꾸던 양반
기생 천민 여종 욕망의 대상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여성
조선시대에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 본관 성에 아내라는 의미로, 광산 김씨, 제주 고씨, 전주 이씨라고 부를 뿐이었다. 물론 특별히 양반집 여성에게는 간혹 당호가 있었지만, 일반적인 여성은 그저 어느 집안 남자에 속한 이름 없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묘비나 족보에도 이름을 쓸 수 없으니 평생을 자기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
내게 아름다운 비단 한 필이 있어(……)/여러 해 장롱 속에 간직하다가/오늘 아침 당신께 선물로 드립니다./님의 바지 짓는 거야 아깝지 않지만/다른 여인 치맛감으론 주지 마세요.
조선의 가장 유명하면서도 방탕한 시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은 허균의 작은 누나이다. 이름은 초희, 호는 난설헌, 자는 경번으로 특별하게도 이름이 있었고, 그의 생은 이름과 더불어 불행의 연속이었으며 1589년 애석하게도 스물일곱 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 어릴 때 죽은 아들, 딸 무덤 곁에 묻혔다.
허난설헌은 신사임당과 같은 규수였지만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다. 그가 현모양처의 맹종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의 예속을 깊게 깨달았을 때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녀는 삼한으로, 첫째 조선에 태어난 것, 둘째 여성으로 태어난 것, 셋째, 부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것을 말함으로써 남존여비 사회에서 조선 여성이 처한 현실을 증오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은 체제에서 여성은 남성의 지위에 기대고 있었고, 모든 면에서 오로지 남성만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이 처첩제도였다. 남성은 정실(본부인)을 거느리고도 여러 첩을 둘 수가 있었으나 여성은 두 번 시집갈 수 없었다. 남성은 공식 제도인 기생과 즐길 수 있어도 여성은 혹독하게 순결을 강요당했다. 현모양처는 남성들의 특혜가 됐다.
제주 노동요 맷돌노래에 남성이 누구인지,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라는 구절이 있다.
밤에 들고 밤에 간 손님/어느 고을 누군 줄 알리/대문 앞에 청(靑)버드낭에/이름 석 자 쓰고나 가라
조선시대 양반 남성들은 양인과 기생, 여종을 쉽게 첩으로 삼을 수 있었고 성적 유희를 누릴 수 있었다. 이는 신분사회 남성들의 관례가 돼 양반 여성과 반대되는 여성들을 차별대우하도록 만들었다. 역사를 인용해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비련의 사랑 타령은 알고 보면 신분적 억압, 특권, 사회 분위기에서 발생한 엘레지이거나, 아니면 집안 건사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혼맥을 유지하려는 지방 토호들의 신분 상승의 목적에 불과했다. 사실상 양반 남성들은 천민인 기생이나 여종의 성을 쉽게 농락할 수 있었으며, 그 증거로써 노비의 호구단자를 보면, 태어난 자녀 항목에 '부부지(夫不知)'라고 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라는 표현을 쉽게 볼 수 있다. 집 재산으로 취급되던 여종은 양반 사회의 대표적인 성폭력 피해자였다. 이를 확대해 보면, 벼슬아치 양반이 어느 날 어떤 이유로 권력 투쟁에 밀려 유배 죄인이 됐을 경우, 그 역시도 양반 신분이기에 여전히 유배지에서 첩을 들이고는 기나긴 유배 생활하는 동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여성에게 온갖 집안일을 받으면서 성적 욕망도 충족할 수 있었다. 일명 배수첩이라고 하는 이 현지처는 유배 죄인의 첩이라는 의미이며, 체면을 중시 여겼던 조선의 양반 사회에서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정사에서나 개인 문집에서 배수첩이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어려우며, 그저 측실, 혹은 계배, 삼실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가난한 현지처와 외면되는 서얼
동계 정온이 지은 시 가운데 「가난한 여인의 노래」라는 특이한 시가 있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여성의 일상생활로 보아 유배지에서 함께 사는 측실, 즉 배수첩이었다. 이 여성은 대정고을에서 한 명의 아들을 낳았다.
흰옷 입은 가난한 여인 모습이 말이 아닌데/등불 아래 바늘 들고 옷을 깁는다/밤 깊도록 졸면서 옷도 풀지 못하고/아침이면 좁쌀을 꾸어다 또 방아를 찧어야 하네
「동계연보」에는 정온이 53세(1621) 가 되는 해 제주 측실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12월에 측실의 아들 창근이 태어났다. 후일 창근은 남한산성에서 정온의 곁을 지켰다. 부사과에 보임됐다'라고 기록돼 있을 뿐 더 자세한 내용은 없다. 「초계정씨 동계가문 가계도략」에는 정온의 정실 소생 아들들인 창시, 창훈, 창모의 가계만 있고, 서자 창근의 가계는 보이지 않는다(김학수, 2011).
조경이 지은 정온의 「시장」에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 창시는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공의 상을 겨우 치른 뒤 병으로 죽었고, 창훈과 창모는 모두 재주가 있었으나 연이어 일찍 죽었다. 측실의 아들 창근은 사과(司果)이다. 창시의 아들 기수가 공의 제사를 받든다'라고 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아들이 분명 넷인데도 조경의 「시장」에는 아들 셋을 거명한 다음, 측실의 아들 창근을 따로 소개하고 있다. 또 허목의 「동계 선생 행장」에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 적서차별이라는 신분의 벽을 실감하게 한다.
실제로 정온도 신분에 대해서는 적서차별의 인식이 뚜렷했다. 훗날 유배지에서 돌아와 대사간에 제수됐을 때, 어떤 재상이 인조에게 건의하기를, "유능한 인재가 많이 억눌려 있으니 서얼의 등용길을 넓혀주자"라고 하자, 정온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정온은 200년 이어온 조선의 명분을 들어 "적자와 얼자(첩의 자식) 사이의 존비 구분은 천지 사이의 떳떳한 도리로서 문란해서는 안 된다"라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런 정온이 논리대로라면 대정 유배지에서 배수첩과 살면서 아들을 낳은 것은 모순된다. 자신이 낳은 자식의 길을 자기가 막고 있는 것, 조선의 강상윤리가 이러했다. 서얼의 관직 진출을 막은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임진왜란 직후 반짝 길을 열었다가 반복되는 논쟁 속에서, 양첩과 천첩의 서얼을 구분해 낮은 관직에 등용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서얼 출신의 유생들이 집단 상소를 올리는 일이 허다했으나 만족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 서얼의 등용을 처음 거론한 것은 선조 때 병조판서에 있었던 율곡 이이였다. 또 병자호란 때 정온과 반대에 섰던 주화파 최명길은 오히려 서얼의 등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요직은 허가하고 청직은 허가하지 않는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얼마 없어 다시 서얼의 등용은 유명무실해졌다.
이처럼 조선조 내내 신분 차별이 심해지자 서얼 출신들의 불만은 종종 범죄에 연루되거나 반란의 이유로 자주 등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