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간의 정전, 혼란한 거리
신호체계 마비됐지만 통제 안돼
재난문자도 없어 상황 파악 애로
도·한전 "재난 상황까진 아니다"
사고 현장과 탁상 행정 판단 괴리
주말밤인 지난 3일 오후 9시38분. 제주시에서도 번화가로 꼽히는 제주시청 대학로 입구 상가의 모든 불이 꺼졌다. 갑작스런 정전에 시민들은 크게 당황하면서도 되도록 침착하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불이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혼란스러운 모습이 감지됐다. 신호등마저 꺼진 탓에 도로는 뛰어다니는 사람과 자동차로 난리였다. '재난문자'마저 오지 않아 상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랐다. 현장에서는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공공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히 약 10분 뒤 불이 들어왔지만, 무방비 속 언제 불이 켜질지 모르는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의 체감시간은 어땠을까. 결코 짧지 않았던 시간 무방비 상태에 놓인 번화가에 기자가 있었다.
처음 정전이 발생했을 때 혼란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건물 안에 있던 시민들은 제법 질서 있게 탈출했고, 중앙로만 불이 꺼졌을 뿐, 멀리 광양사거리에는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상황이 신기하다는 듯 실황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는 시민들도 있었다. 정전된 PC방에서 수십명이 쏟아져 나올 때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시민들간 충돌이나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후부터였다. 3~4분이 지나도록 불이 켜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거리는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불안감에 일정을 정리하고 귀가하려는 시민들이 잇따랐지만, 정전과 함께 마비된 신호체계가 발목을 잡았다.
신호등이 마비된 상태에서 차량들은 서행하지 않았다. 되레 과속하며 시민들을 위협하는 차량도 있었다. 간혹 택시 및 버스기사들이 이상징후를 느껴 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은 제 할일을 하러 떠났다.
멀리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지만 당장 눈앞에 현장을 정리할 수 있는 인력은 없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제주시청 건물은 시민대피 등 상황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무인관제시스템의 먹통으로 시민들을 현장에 묶어놓았다.
7~8분이 지나도록 상황은 그대로였다. 상황을 설명하는 '재난 문자'도 오지 않았다. 시민들은 언제 불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사실에 그저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정전 후 약 10분 뒤인 오후 9시48분께 불이 들어왔다. 시민들은 안도감을 내쉬었지만 지난 10분간 겪은 일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위기상황'때 무방비에 내몰린 탓이다.
정전된 번화가, 갑자기 몰려나온 인파, 먹통된 신호체계까지 현장에서 느끼기엔 '재난 상황'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행정당국이 보기에는 '재난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제주도는 3일 발생한 정전은 단순한 전기사고라고 선을 그었다. 도가 판단하기에 광역 정전 등 재난 매뉴얼 가동 상황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기사고에 재난 문자를 발송하는 한전 역시 마찬가지다. 한전 제주본부는 재난문자 발송 기준은 고장 규모가 120㎿이어야 하지만, 전날 사고는 46㎿였기 때문에 재난문자 발송 등의 기준에 충족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고 발생 장소 위주가 아닌, 사고 규모 위주의 매뉴얼인 것이다.
사고 발생 시간동안 298건의 119신고접수가 이뤄졌다. 이 중에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고도 있었다.
이날 사고는 일도2동, 이도2동, 아라동, 건입동, 도련동 등 넓게 분포됐다. 사고 원인 역시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제주도 당국이 보기에는 즉각 대응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