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49. 배수첩 <3>

신분 귀천 따지는 낙후된 사회
남녀 원초적 본능 막을 수 없어
민주주의 유지 신분 질서의 해체  

△사람을 귀천의 등급으로 매기는 사회 

조선시대는 신분사회로 전 분야에 걸쳐서 강력한 위계질서 아래 소위 피지배층에 대한 제약과 수탈이 심했다. 천민들은 자신이 처한 신분을 기반으로 직업, 의무적인 조세, 요역까지 하루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신분 위계질서는 사람을 귀천이라는 등급으로 매겨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인데, 신분을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이라는 네 등급으로 나눴다. 이 네 등급 중 천민을 제외해 양민이라고 불렀다. 천민은 다시 칠반공천과 팔반사천으로 나누어졌다. 이를테면 칠반공천은 기생, 내인, 이족, 역졸, 뇌령, 관노비, 유죄도망자 등 일곱 가지 신분이었고, 다시 팔반사천은 승려, 영인(伶人·악공), 재인(才人·광대), 무녀, 사당(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파는 무리), 거사, 혜장(가죽신을 만드는 장인), 백정 등 여덟 가지 신분을 말한다(김중섭, 1994). 물론 당대의 현실은 이보다 더 많은 천민 계열의 신분들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줄지어 있었다. 사실상 조선왕조는 이들의 노동력과 이들에 대한 수탈로 지탱되는 사회였다. 

그렇지만 이들 신분 사이에도 큰 격차가 있었디. 같은 천민이어도 지배계급인 양반들과의 관련 정도에 따라서 처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관노비는 다른 천민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서 사노비들은 차라리 대우가 나은 관노비가 되는 것을 바라기도 했으며, 기생은 양반들의 공식적인 성적 유희 대상이었지만, 그런 만큼 지배계급에 가까이에서 양반들의 생활 방식을 모방할 수 있었다(박종성, 2003). 특히 제주에서는 기생과 같이 성 접대 인력이 부족하면 양민의 부녀를 모략질해 유녀안을 만들고 지방관아의 성적 유희의 대체 인력으로 삼았다. 

△서자와 얼자

서얼이란 서자와 얼자로 양반(양인)의 자손 중 정실 소생이 아닌 소실(첩)이 낳은 자녀를 뜻하는 신분 계급이며, 서얼에는 다시 서자·서녀와 얼자와 얼녀로 구분할 수 있다. 서자와 얼자를 말하면, 양반이 양인(양반, 중인, 상민)을 첩으로 얻게 되면 서자, 서녀라고 하고, 양반이 여종의 첩에서 낳은 자녀를 얼자와 얼녀라고 한다. 조선시대 종모법은 양반의 첩이 되더라도 어머니가 노비이면 자연히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서 노비가 되고, 낳은 자녀마저 어머니의 소유주인 상전의 재산이 됐다.

사실상 조선시대는 법으로 양인과 천민 사이의 결혼을 금지해 그 위법에 대한 처벌도 엄격했지만, 공공연하게 두 신분 간 결혼이 이루어졌다. 세상에는 통제해도 막지 못하는 것이 있다. 신분의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인 남녀의 관계는 욕망과 애욕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였던 만큼, 애욕이든 경제든, 다른 이해관계든 '끌림과 택함'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가늠하기가 어렵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은 매우 복잡미묘하다. 그것도 원초적 본능이라면 무의식의 감정은 더욱 그 본질을 알 수가 없게 된다. 결코 의식이 무의식을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도 모르는데 상대방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엄격한 신분사회라는 조선시대마저 그랬듯이 마음과 감정 앞에서는 양민과 천민의 사회적 관계도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법은 사회를 반영한다. 제도로도 막지 못하는 남녀의 감정은 그것을 반증하듯 '경국대전' 형전에 비첩의 제도를 명문화했다. 

"대소 관료로서 공노비와 사노비를 아내나 첩으로 삼은 사람의 자녀는 그 아버지가 장예원에 신고하면, 장예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 장부에 기록하고 병조에 공문을 보내 보충대에 들어가게 한다"

태종 15년(1415)부터 시행된 이 법은 관리들이 자신들의 얼자(첩의 아들) 대신 노비 한 명을 대신 장예원에 신고하고 거기 보충대에 편입시켜 1000일 동안의 근무를 마치면 얼자는 면천이 돼 양인이 됐다. 이로써 관리와 천첩 사이에 난 아들은 종9품의 잡직에 얻을 수 있었다. 보충대란 오위도총부 안의 의흥위에 소속된 군대 편재였는데 양반의 천첩 소생의 얼자들이 신분을 바꾸는 종량(양인 신분) 조건으로 입소하는 부대였다. 얼녀는 장예원에 신고하면 보충대 입역이 면제됐지만, 보충대 이수 조건과 더불어 노비 소유자인 상전에게 일정 정도 몸값을 지불해 노비문서를 파기해야 한다. 

고려시대에는 노비는 노비끼리 결혼할 수 있게 했고, 양인과 천민 사이에 결혼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정종 5년(1039)에 노비 자녀들은 자기가 속할 부역처와 노비소유주인 상전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천자수모법을 만들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인과 천민의 혼인이 증가하자 사회적인 문제가 돼 그 해결책으로 노비 자녀의 부모 중 한 명이 천인이면 천인이 되도록 규정했다. 그 결과 천민의 수는 날로 증가하는 반면, 군역을 부담하는 계층인 양인의 수는 점점 감소해, 결국 이 법으로 국가의 이익에 상충되는 모순이 생겨났다. 노비를 소유한 양반에게는 재산이 불어서 좋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노비가 많아질수록 양인이 줄어들어 군역에 큰 차질을 빚어 국가 안보가 불안해졌다.   

이에 따라 조선 건국 초 국방 정책에 비부(양반이 종의 남편인 경우), 노처(양인이 노비의 아내인 경우)가 논란이 됐지만, 노처의 상황은 매우 적은데 반해 비부의 경우가 훨씬 많아 조정에서는 이를 토대로 태종 14년(1414)에 양인증가책으로 비부 소생의 자녀에게 종부법을 적용해 종량(양인신분)하도록 하는 법규를 실행했다. 이에 따라 양인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일정기간 보충군에서 근무하는 조건으로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양인이 되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이 종부법에 따른 유교의 가족 윤리와 노비  감소의 폐단이 드러나자, 불안해진 조선 지배층은 세조 때에 이르러 종부법을 금지하고 종전과 같이 부모 중 한 명의 신분이 천출이면 다시 천민이 되게 했다. 이 종부법의 폐지는 노비가 크게 늘어나게 하는 제도적인 퇴보였다(정병석, 2016).

△양반 얼자들의 벼슬

보충대를 나와 양인이 된 얼자들은 아버지가 어떤 직급에 있는가에 따라 벼슬길이 달라졌다. 2품 이상 고위직인 경우의 비첩 소생인 얼자는 영구히 양민으로 허락해 5품을 한도로 벼슬을 주되, 비록 큰 공이 있더라도 돈, 비단, 땅, 노비로 포상을 하고, 그 품계는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3품관의 얼자에게는 6품이, 4품관의 얼자는 7품, 5·6품관의 얼자에게는 8품, 7·8품관의 얼자에게 9품이, 임시 사무를 보는 권무에게는 학생, 서인의 얼자는 백정을 한도로 규정했다. 중종 39년(1544) 형조에서 공포하길, 적어도 5,6촌은 친속이 멀어졌으니 노비로 잘 부려먹으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조선시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특권만 누리고 책임지지 않는 양반 왕실 사대부 지배층, 천민과 상민을 막론하고 수탈당하는 백성, 억압되는 여성, 천민 여성들에게 가혹한 성적 착취, 장인을 홀대하는 사회, 청탁과 비라가 난무하고, 법을 무시하는 문화, 남존여비, 관리의 부패 등은 유교 국가의 정치체제 헛점이 드러나 결국 패망한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배수첩의 어두운 현실이 있었다. 조선시대를 보노라면 우리는 결코 한 편의 서정시를 쓸 수가 없다. 어쩌면 당대의 화려한 음풍농원의 시문들은 가혹한 신분 구조의 수탈에 의해서 가능했던 문기였으니, 그런 자연을 즐겁게 보게 해준 것은 슬프게도 조선 백성들의 피와 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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