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줄기가 이웃집 담장에 달라붙어 무늬를 남기고 있다 해서 할 수 없이 잘라버렸다. 잊고 있었는데 올해 다시 피어 어김없이 이웃집 담장에 달라붙었다. 줄기가 올라가는 방향을 잡아주느라 이러저러한 방법을 써 보았으나 소용이 없다. 능소화도 누울 자리가 있어야 가지를 뻗는 것이다. 분명 한소리 들을 것이 뻔한데 어찌 해야 하나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하니, 꽃이 담장을 덮는다고 한소리 들어야 할 일인가 싶어 씁쓸해진다. 오히려 담장에 무늬를 새겨주는 일 아닌가 마음으로만 항변하고 있다. 

입추 지나면서 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다시 기승을 부린다. 마당에 봉선화도 풀이 죽었다. 봉숭아물을 들여야 하는데 말라버린 잎사귀와 꽃에게 미안한 마음에 좀 더 때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했더니, "살만하구나"라며 약간의 한숨 섞인 말로 질문 아닌 질문을 한다. "살만하지"라고 화답해주었다. 동시에 '살만하다는 게 뭐지?' 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결론은,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살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 아닌가! 어제의 내가 지금이고, 지금이 내일의 내가 될 것이라는 사고에 차단기를 내리지 않는 한 연결된 자의식은 끊임없이 절벽을 향해 기어오르기 마련이다. 

비 오는 여름 한낮
내 방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전봇대는
참으로 순해 보입니다.
거기엔 능소화 몇 송이 몸피처럼
저들을 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란다에서 아직 다 가지 않은 여름을 견디다 말라죽은
아스파라거스 화분 위로 누런 잎들에 가만히 손 얹으며
먼 산 바라보는 비 오는 날 오후
저렇듯 생의 절정에 다다르기 위해
제 몸을 밀어 올리는 것들이 참으로
눈물겹기도 하고
온몸을 비틀 대로 비틀어
목숨 없는 것들에 몸 섞으며
또 한 생을 피워 내는 저들 앞에서
나는 숨이 가빠지기도 합니다.
저렇듯 죽은 것들 위에 숨결 포개는 것들 때문에
멸망할 수 없는 생이 거기까지 가 닿습니다.
(김창균 시 「능소화」 전문)

"생의 절정에 다다르기 위해 제 몸을 밀어 올리는 것들이" 꽃만은 아니다. 이 더운 여름을 오토바이 한 대에 몸을 맡기고 속도전을 치르며 누군가의 배를 채우러 달리는 자가 있지 않은가. 마른 잎들은 왜 땅으로만 꺼져 가는지. 물 폭탄이 쏟아지면서 막힌 하수구를 맨손으로 뚫은 누군가의 선행도 잊지 말아야 할 몸부림인 것이다. 

시대가 아플수록 아주 작은 것들이 소중해진다. 아주 작은 것들을 소중히 지키지 못한 대가는 너무 큰 사회적 부담으로 책임 지워지고 있다. 무심코 버린 쓰레기는 하수구를 막아 홍수를 일으키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간 누군가의 언어폭력은 살인범을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따분하고 귀찮아서 생각하기를 게을리한 것이 제2, 제3의 전쟁과 학살, 내란을 묵인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딘가에서 매케한 냄새가 나고 따닥다닥 장작 타는 듯한 소리가 난다. 음악은 시냇물 흐르고, 소리는 새소리처럼 아련하게 들린다. 하늘은 푸르고,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고 아기는 해실해실 웃는다.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그런데 오내지 모르게 불안하다. 너무 행복해서 불안한가.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관심구역이라는 뜻이다. 영화의 배경은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숨죽여 보고, 듣게 한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비현실적이다. 여기서 사실적이라는 말은, 카메라를 다른 각도로 보면 피 하나 흘리지 않고도 잔혹함을 보여줄 수 있는 영특함을 의미한다. 

영화 속 주인공 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으로 집단학살에 가담했으나 직업인으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가 원한 건 가족의 안녕과 행복, 그리고 승진, 약간의 부수익으로 남들보다 조금은 부유하게 사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평범한 시민의 평균치의 바람이다. 하지만 그가 한 행위는 인류역사상 최악이라고 평가받는 악행범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하는 행위의 중요성과 의미를 사유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래도 영화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철조망 벽 위에 간격을 두고 놓인 사과가 인상적이다. 영화 말미에 폴란드인 알렉산드라가 유대인들을 위해 남겨둔 사과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흐르는 연주곡 '햇살(Sunbeams)'은 우리에게 아직 선을 향한 의지가 있음을, 어둠의 과거를 성찰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주는 건 아닌지 희망회로를 돌려보는 무리인가. 히틀러에게 처형당한 본 회퍼 목사는 죽으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라고. 능소화는 가지를 잘랐어도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새로운 여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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