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50. 배수첩 <4>
원한 맺힌 혼백 천년 남으리
연인같은 명창 배수녀 석례
일왕이 준 은사금 받은 부마
△배수녀에서 부실로
상소란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사 표현의 한 가지로서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또는 그 문서를 말한다. 주로 간관이나 삼관(예문관, 성균관, 교서관)의 관원이 임금에게 정사를 간하기 위해 올렸다. 상소는 조선의 선비정신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왕은 이를 적절하게 이용해 한쪽 세력이 커가는 것을 견제했다.
왕은 신하들의 상소를 통해서 반대 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으며, 유배형은 왕권 강화에 조절하는 효과적인 형벌이 됐다. 유형 기간을 고무줄처럼 늘릴 수 있어서, 유배인들은 기다림과 기대심의 연속적인 나날을 보내어 변방에서 무료한 날을 보내야 했다. 조천의 연북정이 유배인들이 해배되기를 바라는 기다림의 상징적인 장소였다.
어떤 유배죄인은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어떤 이는 현지에서 첩을 얻어 아이까지 낳고 살았다. 물론 처음부터 첩을 들일 수는 없었고, 소위 방비나 허드렛일하는 소녀, 양인 여성, 과부나 기생 등이 처음에는 배수녀로 오가다가, 시간이 지나 정이 붙어서 배수첩이 되기도 했다.
배수녀가 부실이 된 대표적인 사례는 노론 벽파에 속했던 정헌 조정철이 있다. 정조 시해 사건에 연루돼 참형이라는 극형을 면치 못할 위기에 처했지만, 충신 조태채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감형돼 제주목에 유배됐다. 조정철은 제주 성안 신호의 집에 적소를 마련해 지방 향리 홍처훈의 딸 홍랑(윤애)을 심부름꾼으로 삼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의 감정으로 발전해 1781년 2월에 딸을 낳게 됐다. 그러나 당시 부임한 제주 목사 김시구는 반대 당파인 노론 유배인들을 심문했고, 이때 조정철의 비리를 다시 캐면서 배수녀 홍랑에게 회유책을 썼지만, 홍랑은 끝내 장형을 받으면서도 죽음으로써 의절을 지켰다. 당시 유배인 조정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여를 그냥 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귤나무 우거진 남문 밖 작은 봉분/원한 맺힌 혼백 천년이고 남으리/누가 주과라도 마련해 보살필까. 한 가락 상엿소리에 절로 눈물만 흐르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아기 아빠 조정철은 목숨을 던진 홍랑을 위해 27년간 전국 각지를 돌던 유배가 풀리고, 다시 재등용된 지 7년 만인 순조 11년(1811), 제주 목사가 돼 홍랑의 초라한 무덤을 찾았지만, 여전히 줄 것이라곤 시 한 수가 전부였다. 홍랑은 1997년 양주 조씨 문중의 결의로 조정철과 홍랑 내외가 부부로 인정돼 상주시 함창에 있는 사당 함녕재에 배향됐고, 그해 11월 9일 무려 216일 만에 첫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홍랑은 비로소 배수녀에서 부실(첩)이 됐다(김찬흡, 2002).
△배수첩 김만일 딸과 제주 명창 배수녀
유배지에서 맺어진 여인을 배수첩이라고 부른 이는 운양 김윤식이다. 제주에 많은 유배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글에는 자신이 제주에서 맺은 측실을 배수첩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대개는 이를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유인즉슨 고향의 정실이 무섭기도 하고, 혹은 그 사실이 신분상 천출인 경우 양인을 만들어야 하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어서 대부분 유배지 에 배수첩과 자녀들을 두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제주 유배인 간옹 이익은 광해군 10년(1618)에 제주에 유배돼 5년 동안 섬에 살았다. 「간옹유고」에 의하면, 광해군 11년(1618)에 경주 김씨 김만일의 딸을 3취로 맞았고 2년 뒤 유배지에서 아들 인제를 낳았다, 아들 인제는 서자로서 장자인 정실의 적자 인실이 있었다. 간옹은 유배가 풀리자 인실을 데리고 섬을 떠났지만 헌마공신 김만일의 딸인 어머니 경주 김씨와 차자 인제는 그대로 제주에 남아서 경주 이씨 입도조가 됐다. 배수첩이 낳은 서자 인제는 무과에 급제해 벼슬이 훈련원 판관에 이르렀고, 아들 인제 또한 무과에 급제했다.
김만일 집안의 「경주김씨익화군제주파세보」에 의하면, 오위도총관 김만일은 부인을 셋 두었는데, 정부인 남평문씨 서봉의 딸, 숙부인 창녕 성씨 덕포첨사 경륜의 딸, 그리고 밀양 박씨가 있다. 김만일의 딸이 누구의 소생인지 세보에는 기록이 없다.
북헌 김춘택은 아버지 김진구가 앞서서 온 제주에 유배인이었고, 자신도 제주 유배인이 돼 1706년 9월 말에 조천포로 들어와서 제주성안 가락천변 관기 오진의 집을 유배지로 삼았다. 관기 오진의 집은 16년 전 아버지 김진구가 6년 동안 머물렀던 매우 익숙한 집이어서 비교적 평안했다. 북헌은 남인과는 오월동주와 같은 사이에서 남인 이잠의 상소로 세자(훗날 경종)를 모해하려고 한다는 무고로 유배됐다. 북헌은 유배지에서 제자를 길러 오정빈, 고만첨, 정창원 등 3명의 제자를 급제시켰다. 북헌은 유배 온 이듬해 북성 밖 산지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무고 사건이 일어나 서울로 압송돼 갔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제주성 남성 안에서 살다가 다시 전라도 임피현으로 이배됐다가 후에 다시 제주로 유배를 왔다.
「서재집」에 의하면, 북헌의 유배살이 때 나이 든 기생 석례가 서재 임징하의 적소에 찾아와 '별사미인곡'을 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다섯 번째 유배 중 마지막은 대정현 경내로 추정한다(김찬흡, 2002). 북헌은 유배지였던 제주성 남성에서 '별사미인곡'을 썼는데 두 여인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임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내해 변치 않는 단심을 표현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 죽어 뼈 갈라진 후에도 님 향한 이 마음 변할 수 있겠는가. 각시님 잔 가득 부으시고 한 시름 잊으소서… "
이 유배지에서 지은 별사미인곡에 대한 일화를 보면, 북헌은 제주 유배지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매우 잘 부르는 기녀 명창 석례를 만났다고 한다. 노기 석례가 별사미인곡의 모델이자 친한 기생이어서 북헌이 지은 가사를 부르게 해 창에 알맞은 노랫말로 고쳐나갔다고 한다. 사실상 석례는 북헌과 매우 가까웠지만, 배수첩으로서가 아니라 그가 존경하는 지기이자 유배지의 연인, 즉 배수녀라고 할 수 있다.
△박영효의 신분과 이름 모르는 배수첩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유배 온 유배인 중에 박영효가 있디. 박영효는 철종의 서녀 영혜옹주와 결혼해 부마가 돼 금릉위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어린 영혜옹주는 13살이 나이로 결혼 석달이 안돼 세상을 떠났다. 박영효는 고종의 특별한 배려로 18세에 오위도총부 도총관, 종2품 혜민서제조, 20세에 판의금부사에 임명됐다. 박영효는 요직을 맡는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군란을 뒷수습하기 위해 일본은 함상에서 일본공사 하나부사와 제물포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내용에 따르면 조선정부는 군란의 주모자를 처단하고, 일본 정부에 손해보상금을 지불하며, 일본은 공사관을 호위하는 명목으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것이다(김당택, 2009). 동년 8월 조정에서는 박영효에게 제물포 조약으로 체결된 수신사 정사로 일본에 보냈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박영효는 태극기를 그렸는데 고베의 니시무라 여관에 도착해 깃대에 그 태극기를 달았다. 최초의 태극기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 당시 역관 이응준이 만들었다고 한다. 수신사 사절에는 김옥균과 민영익도 끼어 있었다. 그 후 박영효는 일본 세력에게 군부 내에 반 양위파와 통모해 고종의 양위에 찬성한 이완용, 조중웅 등 정부대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 유배형 1년이 내려졌다. 박영효는 유배 3개월 만에 제주 성 남쪽 독짓골(구남동)에 집과 너른 과수원을 매입해 불편했던 김희주의 집을 나왔다. 박영효는 새로운 집에 살면서 신분과 이름을 모르는 무명의 여인을 배수첩으로 삼았다. 그후 박영효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친일한 댓가로 후작 작위와 일왕이 주는 은사금 28만원(현재 50억)을 받아 이완용보다도 20억원을 더 받았다(전웅, 2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