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이라고 하기엔 아직 아쉬움이 남았는지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에도 해수욕장에는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곳에 눈을 고정하고 연신 손을 내젓는 이의 안타까움이 보일 법도 하지만 지금을 즐기는 자에겐 역부족인 듯하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여한없이 즐기겠다는 이의 열정을 그 누가 이기겠는가. 

바닷가 앞 커피숍에 앉아 '깔라만시에이드' 한 잔 시켜놓고 가만 생각해보니 올여름은 바다에 발 한 번 담그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 같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더위에 지고 만 셈이다. 콩밭에 들어앉아 김매던 시절의 여름도 이렇게 더웠을까 싶다. 그 시절의 여름은 모기떼나 더위 걱정보다는 태풍이 더 무서웠고, 어젯밤 물들인 봉숭아물이 지워질까 두려웠다. 뭘 잘 몰랐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궁금한 게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흩어지는 구름이란 걸
나 그때는 알지 못했네
손대면 닿을 것만 같았는데
안녕이란 돌고 도는걸
나는 그때 알지 못했네
만남과 이별 다음에 만남을
키 높인 발 담 너머의 세상
뭐 그리 궁금했던 걸까
난 무얼 본 걸까 그때
열을 전부 세기도 전에
달아나던 친구들처럼
여전히 내겐 조금 빠른듯한
세상의 모든 발걸음
(중략)
사랑을 다 말하기 전에
이른 밤이 오지 않도록
난 느끼리라 매일 파도처럼
부딪혀오는 세상을
부르리라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을
어느 먼 훗날
너무 사무치게 그리울 하루
어쩌면 오늘
(김이나 작사, 손태진 노래 '오늘' 부분)

입 안에서 맴돌던 노래가 느닷없이 큰소리로 흘러나와 주위 사람들이 흘깃 쳐다본다. 내 안의 아이가 불쑥 튀어나왔을 뿐인데, 어른들의 시선에 주눅이 들고 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노래를 주워 담았으나 "열을 전부 세기도 전에 달아나던 친구들처럼 여전히 내겐조금 빠른 듯한 세상의 발걸음"에서 울컥하고 목이 멘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바다에 발 한 번 담그지 못하고 여름을 다 보내는가 싶다.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달려가 보는 거야. 내 안의 또 내가 나를 바다로 등을 떠민다. 

얼마 전, '방랑자'라는 영화를 봐서 그런지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상들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바다를 마주한 노을진 저녁과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찰떡궁합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팔순을 앞둔 감독은 자신이 삶의 거의 모든 것을 해변이 담고 있다고 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감독 자신의 한 생을 돌아보는 자전적 다큐멘터리이다. 물론 기억이 시간 순서대로 흐르지 않듯이 그의 영상도 비선형적이다. 

해초가 널부러진 해변에 느닷없는 거울들이 등장한다. 밀물과 썰물이 서로 겹쳐 흐르듯이 큰 거울과 작은 거울, 비스듬한 거울과 반듯한 거울이 교차된다. 그것은 어떤 상징이며 은유일 터이다. 과거가 현재의 나를 비추고, 그 안에서 숱한 이들의 얼굴들이 되살아나며 굴절된다. 거울은 특정 시간의 경험과 감정, 사람을 연결하기도 하고 굴절시키기도 한다. 굴절된 시간 속의 풍경과 사람들은 현재의 아녜스 바르다의 얼굴과 오버랩된다. 그의 영화작업은 서사성 있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그림그리기 또는 글쓰기에 가깝다. 글쓰기 중에서도 시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글쓰기는 목격자가 되는 것이고, 글쓰기는 우리를 하나의 우주로 안내하는데 이 우주는 글쓰기라는 매개체가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하나의 구조물을 만들고 우리는 눈과 귀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 극장'에서도 효과를 일으켜 우리 안에 반쯤 잠들어 있는 감정을 깨어나게 한다."('아네스 바르다의 말' 중에서)

결국,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은 감독 자신의 한 생에 가장 소중한 기억들과 조우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말한다. "매일 파도처럼 부딪혀오는 세상을" 관찰하고 노래 부르며, "어느 먼 훗날 너무 사무치게 그리울 하루"를 만끽하는 행위예술, 그것이 바로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이다.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발목이 희도록 파도에 첨벙대고 싶은 하루. 9월이 온다고 한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오늘이지만 모처럼의 여유를 부리며 생각한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에 켜켜이 쌓여 가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니 좋은 노래에는 좋은 시가 이미 담겨 있다. 

여름 햇살과
추운 겨울마다 하얀 첫눈에 담겨진
내 기억들과 소중했던 사람들
책갈피처럼 가장 좋은 날들이
하나둘 쌓이네
(김이나 작사, 손태진 노래 '오늘' 부분)

이렇게 뒷북치는 하루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지금 이 순간도 내일에 함께 흐를 것이니 그리 애석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정중하게 인사는 하고 가자. 사무치게 그리울 하루, 오늘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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