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52. 임 찾아가는 배수첩
청일전쟁 피해 온 의주 출신 배수첩
유배인의 섬을 찾아가 살림살이해
김윤식과 이용호의 빛나는 저서 남겨
△내각의 외부대신 김윤식
김윤식은 청풍인으로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육의 9세손이 된다. 아버지는 김익태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며, 한강 변 두모포(荳毛浦)에서 태어났다. 김윤식이 7세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 12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누님 세 명과 같이 살다가 이듬해 6살 위 작은 누님이 사망하자 입양 간 숙부가 이들을 가련하게 여긴 여겨서 경기도 귀천으로 데려다가 자기 5형제와 같이 키웠다. 그는 당시 석학이었던 유신환에게서 배워 1865년 31세의 나이로 초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있으면서 「음청사(陰晴史)」와 「속음청사(續陰晴史)」를 썼다. 고종 11년(1874) 5월 증광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876년 황해도 암행어사, 1880년 순천부사(順天府使), 고종 18년(1881) 9월 영선사(領選使)로써 청나라 북경에 다녀왔다. 전권공사로써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각국과 통상조약이나 어업협정을 체결했다.
김윤식은 고종 19년(1882) 대원군 이하응의 집권에 반대하는 명성 황후의 책략에 따라 대원군을 퇴진시키기 위해 이홍장(李鴻章)의 군대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납치하면서 민 씨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았지만,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면서 개화 세력은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갈라졌다. 김홍집, 어윤중, 이조연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화파는 청에 의지하면서 개화 정책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들은 청의 내정간섭을 인정해주면서 자강운동 같은 방식을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이 성공한 메이지유신을 따르려고 했다. 중도파의 길을 가던 민영익이 보빙사로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돌아온 후 이들의 사이는 더 벌어졌다. 두 파는 서로 더욱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었다. 민영익은 김옥균으로부터 개화사상을 받은 인물로 고종과 명성 황후의 신임받아서 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이계형, 2018).
청나라의 힘을 업고 집권한 민 씨 정권은 일본파인 김옥균 일파를 견지하고 있었다. 김옥균의 개화파와 민 씨 정권의 대립은 국가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격화되었다. 정부는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건의에 따라 기존에 사용하고 있던 화폐 엽전의 다섯 배에 해당하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국가 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옥균 등은 이런 해결책에 동조하지 않았다. 악화(惡貨)의 주조가 국가의 재정을 타개하기보다는 오히려 물가를 폭등시켜 민생에 더 큰 어려움을 가져다준다고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일본에서 차관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이 주장의 저변에는 차관을 도입하여 자신들의 정치자금을 해결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이에 고종은 이에 김옥균을 일본에 파견하여 차관 도입을 추진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새로 조선에 부임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조선 정계에서 김옥균 등의 개화파의 영향력이 그리 대단치 않다고 보고함으로써 일본 정부는 이들을 기피하였다. 이에 따라 차관 도입도 실패하자 개화당의 정치적 입장도 난처해졌다. 한편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태도가 일본에 다녀온 후 급변했다. 다케조에는 제물포 조약 당시 조선이 지급한 배상을 돌려주면서 조선 정부의 내정 개혁을 촉구했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김윤식은 3차에 걸쳐서 내각 외부대신의 중임을 맡았다.
김윤식은 고종 32년(1895) 8월 29일 명성 황후가 살해당하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을 맡아 정부는 왕후폐위조칙에 서명한 것의 죄를 물어 1897년 제주도 유배 종신형이 내려졌다.
1897년 12월 21일부터 제주 성안에서 유배 생활 중 이재수 신축민란이 터지자 1901년 7월 10일 전라남도 무안군 지도로 이배되었다. 김윤식은 제주도 유배중에 방성칠과 이재수의 민란을 겪었으며, 해당 시기 이에 대한 기록은 속음청사에 장 나타나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광무 11년(1907) 4월 김윤식이 사면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김윤식은 나이가 70을 넘었는데도 정력이 강해서 소년 같았으며, 제주에 귀양 가 있을 때 두 아들을 낳았다. 지난겨울 70세 이상인 귀양인들 모두에게 사면령을 내려졌지만, 김윤식만 홀로 빠진 것을 일진회의 노력으로 사면된 것이다. 1907년 10월 김윤식은 흥사단을 창설했다. 1908년 5월에는 김윤식과 유길준 등이 향약과 비슷한 것으로 애국하다 죽은 인사들의 추모를 위한 강구회(講舊會)를 만들었다. 1908년 6월에 김윤식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에 갔다.
△배수첩 의실과의 생활
제주 유배 중 김윤식은 배수첩을 들였다.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보면, "여름에 적소(謫所)에서 한 여자에게 밥을 짓고 빨래하는 일을 맡기니 그녀가 의실이다." 배수녀였던 의실이 나중에 배수첩이 된 것이다. 의실이는 평안도 의주 사람으로 김해김씨이다. 청일전쟁을 피해서 어머니(妾母), 언니와 함께 제주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1899년 6월 김윤식은 배수첩 의실이에게서 서자를 낳았는데 이름을 영구라고 지어주었다. 1901년 2월이 되면 김윤식은 김응빈의 적거지에서 산 지 3년 만에 이웃집을 850냥을 주고 사서 나인영, 배 수첩, 서자 영구, 첩보 하고 이사했다.
1901년 이재수의 신축민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민란이 있을 때마다 유배인들을 다른 검으로 이배를 시켰다. 민란에 유배인이 가담하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였다. 1901년 6월 중순에 순검 김인택이 입도하여 제주목사 이재호에게 유배인들의 이배령에 대한 공문을 전달했다. 이로써 7월이 되면 청지기를 앞세워 유배인 김윤식은 정병조, 김사찬 등과 함께 압송관 법부주사 남길희가 이끄는 데로 김윤식은 전남 지도군 지도(智島, 지금의 신안군)에, 이용호와 이범주는 완도군 신지도로, 정병조는 위도, 김사찬은 임지도로, 최형순과 장윤선은 진도군 금갑도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윤식과 정병조, 김사찬이 지도에 도착하자 집을 구하고 청지기를 시켜 집을 수리하도록 했다. 이튿날이 되자 김윤식의 외아들 유증, 배수첩, 서자 영구가 지도로 왔다. 이미 지도에는 여러 유배인들이 있었다. 어떤 유배인들은 다른 섬에 지정되어도 그 섬으로 가지 않고 지도의 유배인들과 같이 머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정병조가 위도에 가지 않고, 지도 읍내에 정한 것이다, 김사찬도 김윤식이 잠시 머물던 집을 수리해 적거지로 삼았다. 물이 번지듯이 감정도 번지는 법이다. 김윤식이 배수첩을 데려와서 그런지 8월이 되면 정병조의 배수첩 추월이, 김사찬의 배수첩 금강월이 같은 배를 타고 지도로 왔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사찬의 첩모까지 제주에서 지도로 건너왔다.
1903년 1월에 정병조의 배수첩이 서자를 낳았고, 같은 해 5월에는 서주보의 배수첩 해상월이 병사했다는 서찰을 받기도 했다. 8월에는 유배지 지도에서 일이 생겼다. 지도의 주막에서 술을 먹던 유배인 정병조와 황병욱이 섬 주민들과 시비가 붙어 황병욱은 도망을 가서 안전했고, 정병조는 붙잡혀서 폭행당했다. 12월 초과하면 중추원 김 가진 등이 상소를 올려 김윤식의 율법을 더 독하게 행하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광무 8년(1904) 1월에 다시 임금에게 정부와 민영환 등도 상소를 올려 김윤식을 더욱 중한 벌로 다스리라고 청했으나 고종황제는 여전히 거절하는 답변만 돌아왔다.
1904년 11월이 되면 김윤식의 배수첩 의실이가 서자를 낳았는데 이름을 철용이라고 지었다. 1905년 같은 지도의 유배인 정병조가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한성까지 갔다. 정병조는 지난달에도 함평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배정된 배소를 마음대로 이탈한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인데 법이 미치지를 못하는 것은 나라의 정치가 기강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더 이상한 유배인도 있었다. 제주도에 종신유배에 처해진 한 유배인은 추자도로 유배되자 도망쳐 일본인과 사사로운 이권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가 발각돼 다시 체포되어 추자도에 종신유배형에 처해졌지만 또 도망쳤다가 붙잡혀 7년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그래서 법부(法部:법무부)에서는 유배인들이 도망친 사람들을 본받을까 봐 고종황제에게 글을 올리기도 했다(전웅, 2014).
△이여도에 대한 해석
유배인 교리 이용호(李容鎬)는 흥선대원군을 추종하여 정부 전복음모를 모의했다는 이유로 제주목에 7년의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용호는 5년의 제주목 적거중에 김윤식과 10여명의 유배인들을 만났으며, 귤회라는 시모임을 만들어 교류했고, 지방민 홍종시, 김희주와도 친부니 있었고, 개인 서당을 열어서 제주의 젊은 인재 김석익을 길러내기도 했다. 이용호 또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수첩 사이에 서자를 두었다. 이용호가 제주 유배 때 남긴 방대한 시문집 「청용만고」(현행복 번역)는 제주를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김윤식의 「속음청사」와 같은 비슷한 시기에 저서로 쌍벽을 이룬다. 이 「청용만고」에 이여도라는 방아질 노래의 후렴구에 '이여도'라는 말이 있는데 이용호는 당시에 이여도(離汝島)를 번역해, "당신을 떠나보낸 섬"이라고 했다. 이후에도 여러 학자들이 이여도, 이어도 등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게 있었으나 이용호의 "당신을 떠나 보낸 섬", 혹은 "너와 이별한 섬"이라고 하는 離汝島 해석만큼 멋들어진 것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