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일보·제주특별자치도 공동기획축산악취 갈등 넘어 '상생의 길'을 찾다 4. 제주형 상생모델의 가능성

18년간 이어진 상생 약속…마을에 활력

매년 수천만원 지역 행사·발전 기금 기부

‘마을 살리’ 위한 농가 선제적 사회공헌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의 초등학생들은 거의 매년 특별한 수학여행을 떠난다. 18년째 이어지는 이 여행의 모든 경비는 마을 양돈 농가들이 책임진다. 학생 수가 줄어 폐교 위기에 놓였던 학교와 마을을 살리기 위해 시작된 농가들의 자발적인 지원은 이제 제주 축산업계가 나아가야 할 ‘상생’의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갈등이 터진 뒤에야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는 소극적 대응을 넘어,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먼저 손을 내미는 선제적 사회공헌이 축산악취 갈등의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음을 금악리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특별한 수학여행’으로 폐교 위기 넘다

10여년 전 농어촌 지역 학교 통폐합 등으로 제주 곳곳의 작은 학교들이 문을 닫던 시절, 제주시 한림읍 금악초등학교 역시 학생 수 100명 미만으로 분교 전환 및 통폐합 위기에 놓였다.

마을과 학교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인 것은 지역 양돈 농가들이었다.

금악리에 주소지를 둔 56곳의 양돈 농가는 ‘금악양돈발전협의회(회장 양흥영)’를 자발적으로 구성하고, “마을을 살리자”는 일념으로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바로 금악초등학교 학생들의 수학여행 경비를 전액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강명수 금악양돈발전협의회 총무는 “폐교를 막고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한 ‘마을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순수한 마음이었다”며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우리 손으로 지키고, 나아가 마을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싶었다”고 말했다.

농가들의 약속은 18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중국으로, 최근에는 대만 등 해외 문화체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코로나19 등으로 해외 길이 막혔을 때는 학생 1인당 30만 원의 장학금을 별도로 지급했고, 지난해에도 1600만 원을 지원해 학생들이 테마파크를 방문하고 패밀리레스토랑을 즐기는 등 특별한 추억을 선물했다.

올해 역시 오는 10월, 6학년 학생 17명을 대상으로 1700여만원을 들여 일본으로 떠나는 수학여행을 지원할 예정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금악초등학교는 분교 위기를 넘기는 등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학생들의 반응도 폭발적이다. 실제 2019년과 2023년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만족도 설문조사에서 만족도는 각각 96.1%와 95.8%에 달했다.

2023년 대만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한 학생은 “연초부터 기대했는데 기대한 것보다 더 재밌게 다녀왔다”며 “3박 4일간 친구들과 잊지 못할 추억이 생겼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학생은 “해외에서 많이 배우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며 “문화체험을 지원해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18년간의 동행, 지역사회와 함께

금악리 양돈 농가들의 사회공헌은 수학여행 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8개 단지의 대표들이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협의회는 마을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지역사회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2023년에만 △수학여행 경비 1760만원 △마을발전기금 1000만원 △금악리 체육대회 100만원 △청년회 운영비 200만원 등 공식적으로 지원한 금액만 3000만원이 훌쩍 넘는다.

이는 협의회 차원의 지원일 뿐, 개별 농장주들이 마을 행사에 별도로 내놓는 기부금까지 합하면 규모는 더욱 커진다.

어버이날 등 마을 행사에 돼지고기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마을 포제 때 회비를 농가들이 내는 등 보이지 않는 지원도 계속되고 있다.

강 총무는 “처음에는 순수하게 학교를 돕자는 마음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도 마을의 일원이라는 생각에 체육대회, 마을 행사 등에도 자연스럽게 힘을 보태게 된 것”이라며 “마지못해 하는 지원이 아니라, 같은 마을 주민으로서 함께 잘살아 보자는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제주형 상생모델의 모범사례

금악리의 사례는 제주 축산악취 문제 해결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되기 전, 농가들이 먼저 지역사회의 필요를 파악하고 손을 내밀어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는 ‘양돈농가가 있으니 보상하라’는 식의 소모적인 갈등 구조를 ‘지역 발전에 함께 기여하는 동반자’라는 관계로 전환시키는 힘이 됐다. 축산 농가가 더 이상 악취를 유발하는 외부인이 아니라, 마을의 학교를 살리고 발전에 기여하는 고마운 이웃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결국 기술적인 악취 저감 노력을 넘어 지역사회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제주 양돈산업의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고기욱 기자

※ 이 기획은 제주특별자치도청 지원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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