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 55. 우도 <3>
마약에 신음하는 늙은 사자 중국
더러운 전쟁을 벌였던 영국 흑심
환해장성 정헌 시집에 처음 명명
△영국이 동쪽으로 온 이유
중국에서 차는 은(銀)을 불렀고, 은은 아편을 불렀으며, 아편은 전쟁을 몰고 왔다.
1832년(순조 32) 3월 22일 영국 동인도회사는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를 중국에 파견했다. 애머스트호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 중국의 북동부 연안의 항구들이 어느 지점까지 영국 상인들에게 개방할 수 있는지, 특히 앞으로 있을 영국과의 통상에 대비하여 사전에 적당한 항구를 찾는 것이었다. 또 중국의 주민과 지방정부가 영국의 무역에 대해 얼마나 우호적인가를 알아보고자 했다. 이 특별한 상선 애머스트호에는 선장 리즈, 영국동인도회사 답사반장이자, 중국 광동성 주재 수석 화물 관리인 린세이, 프로테스탄트 선교사 귀즐라프 등 모두 67명이 타고 있었다. 일행 중 린세이는 중국을 빠르게 장악하려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한 인물이다.
영국의 통상 항구를 위한 이들의 항해는 중국 산둥성을 탐색한 후 1832넌 7월 미몽의 땅 조선으로 뱃전을 돌렸다. 이때 조선을 찾은 개신교 선교사 귀즐라프는 조선을 찾은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선교사가 오고 나면 그 뒤에 총을 든 제국주의가 반드시 따라온다. 조선에 온 귀즐라프는 개신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고 폭력주의자 린세이는 영국의 모직물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이 모직물 뒤에 아편무역이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1833년 동인도 회사의 청나라 무역독점권이 폐지된 것은 항각상인들의 성장이 있었고 그 비중이 나날이 커져 두 국가 사이에 무역총액이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광저우에서 진행되는 무역은 광둥 13행과 서양 상인과의 문제였다. 가경제는 매카트니와 인도 총독 에머스트로 구성된 청나라 사절단이 중국식 의례를 무시한다고 여겨 서양 사절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감정적으로 영국 상인들의 입항을 금지하려다가 현상을 유지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 그만두었다. 반대로 영국 조지 3세는 자신의 사절단에게 보인 중국의 태도를 몹시 언짢아했다. 동인도 회사의 무역 독점권이 폐기된 후 영국은 존 윌리엄 네이피어를 무역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한편 베이징에 있던 도광제는 청나라의 무역수지가 아편 밀매 때문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항각상인들이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청나라에 유입되는 아편의 양이 급증한 이유였다. 황제는 나날이 불어나는 아편을 막는 대책이 아편을 판매하거나, 유통, 흡입을 엄금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에 도광제는 아편 근절을 위한 특명의 조치로 린쩌쉬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 소굴이 된 광저우로 급히 파견했다. 현지에 간 린쩌쉬는 군대를 동원하여 물과 식량을 끊어놓고 아편 제출을 요구하며 영국 상관을 포위하고는 대형 선박에 쌓여있던 약 1280t의 아편을 몰수했다. 린쩌쉬는 아편을 소각하면서 영국인들에게 아편무역 금지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했지만, 영국 상관에서는 재산권 침해라며 크게 반발해 본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편, 영국 정부는 이 분쟁을 이용하여 중국무역에 대한 새로운 입지를 세우려고 했다. 하여 군대 파견을 의회에 요청하자 의회 내에서는 이를 '더러운 전쟁'이라고 반대했으나 하원은 271표 대 232표라는 겨우 9표 차이로 40척의 함선과 4000명의 육군(나중에 병력은 100척의 함선괴 1만 5000명)의 파견이 결정됐다. 1840년 6월 인도정부가 영국을 대신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바야흐로 영국군이 광저우 만으로 진입하면서 아편전쟁이 시작됐다.
△우도에 나타난 영국 함선 사마랑호
동아시아의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과거 이양선의 출몰 상황을 보자. 1622년 5월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와 하이스베르츠, 베르바스트 등이 물과 양식을 구하려고 보트를 타서 경상도 경주 부근 바다에 상륙했다가 붙잡혀 이듬해 서울로 압송됐다. 1653년에는 나가사키 상관으로 가던 동인도 회사 소속 하멜이 제주에 표착했을 때 벨테브레는 하멜의 통역으로 제주에 온다. 1787년 5월 프랑스의 페루즈 함대가 제주도와 울릉도를 탐사하고 돌아갔다. 1791년 8월, 영국 해군 장교 제임스 콜네트 선장이 아르고노트호를 타고서 제주도 주변 해역을 탐사했다. 1816년 9월 영국 함선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를 측량하고 돌아갔다. 1840년 10월 대정현 가파도에 영국 함선 2척이 나타나 흑우 두 마리를 끌고 가면서 동그란 바가지 만한 대포 몇 발을 쏘고 사라졌다. 1845년 6월~8월 영국 함선이 제주도 우도를 시작으로 거금도, 거문도 일대를 탐사하고 해도 3장을 그리고는 다시 거문도로 떠났다. 1848년 5월~7월까지 북쪽 함경도에서부터 남쪽의 전라도 해역까지 수많은 이양선이 출몰했다. 1851년 3월 프랑스 포경선 나르왈호가 대정현 모슬진에 나타나 식량을 요구하니 양식을 주고 보냈다.
한편 1854년 6월 제주도 정의현 우도에 온 함선은 영국의 사마랑호였다. 이 배의 함장은 에드워드 벨처였고, 목적은 6월에서 8월까지 조선의 남해안을 항해하면서 제주도와 거문도 사이의 해역을 정밀 측량하는 것이었다. 이 사마랑호의 통역관으로 중국인 오아순이 타고 있어서 필담으로 조선인과 소통을 했다. 사마랑호는 1843년 양력 1월 13일 벨처를 태우고 영국을 출발하면서 영국 정부로부터 1842년 남경조약으로 개방된 항구를 탐사하는 임무를 받았다. 영국 정부는 중국의 해안이 긴장감이 도는 까닭에 광동 이북의 해안 영토에는 접근을 금지하도록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벨처는 기수를 서쪽으로 돌려 싱가포르, 보르네오, 필리핀 등을 측량한 다음, 1845년 4월 1일 다시 홍콩에 도착했다. 벨처는 한 달 남짓 지나서 5월 9일 류큐를 탐사한 후, 6월 21일 류큐를 출발하여 25일 아침 켈파트(제주도) 남쪽 우도에 정박했다.
사마랑호의 우도 정박에 대해서 제주 선비 심재 김석익은 "때때로 포를 쏘면 산악이 울렸다. 작은 종선으로 큰 배에서 내려 노끈으로 섬을 측량하였는데 백보쯤 되는 거리마다 돌을 모아 회칠을 하고, 쇠못을 그 위에 박으면서 앞으로 제주 연안을 두루 측량하니 그 까닭을 묻자 제주의 지형과 해도를 그린다고 했다" 당시 제주 목사 권직이 두려워 마병·총수·성정군을 모집해 사변에 대비하였다"
심재의 제자 송강 김정탁도 이를 언급하고 있다. "여름에 이양선 1척이 앞 바다에 정박했다가 포구 앞을 지나면서 연속하여 대포를 쏘니 동민이 다 두려워하여 경자년(庚子年:1840년 양국 함대가 가파도 침탈)의 일과 다름 없었다. 겨울에 목사 권직이 삼읍에 명하여 환해장성을 수축하고 망지기를 두게 했는데, 이는 이양선이 나타나는 것을 살펴서 봉화로 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환해장성, 정헌 조정철이 처음 붙인 이름
권직이 삼읍에 환해장성을 축조한 것은 헌종 11년 겨울이다. 지난 여름 이양선 1척이 우도 앞 바다에 정박하면서 측량한 사건 때문이었다. 점점 세계는 더욱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제국주의가 시장을 독점하면서 그것을 차지하려는 제2, 제3의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19세기에는 그것이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동쪽으로 이동, 오늘날은 북아메리카가 자본주의 종주국이 ㅤㄷㅗㅆ으나 점점 쇠퇴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환해장성은 19세기 제국주의 이양선의 침탈을 우려해 개축한 변방의 성담이며 정의현에 유배왔던 조정철의 저서, 『정헌영해처감록』(1824)에 처음 '환해장성'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