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도63,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조선 피한 바타비아 데지마 항로
하멜 귀환 후 공포의 섬 제주도
무속·유교가 여전한 구식의 섬
1630년 무렵 네덜란드에서 건조된 켈파트 드 브락(Quelpaert de black)호는 쿠로시오 해류의 물살을 타고 나가사키 항로를 따라가던 중 제주도를 처음 발견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이를 보고했다. 이때부터 제주도는 '켈파트호가 발견한 섬'이라고 알려졌다가 하멜의 귀환 이후 유럽 지도에서는 제주도를 켈파트로 표기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영국은 우리나라 사서(史書)에 영길리국으로 알려졌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회사를 런던에 세웠다. 영국은 이미 네덜란드보다 앞서서 1591년~1594년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원정대를 보내고 향료 무역에 눈독을 들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무역의 독점권을 가진 회사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시아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1613년 영국동인도회사는 인도 서부 수라트에 무역거점기지를 만들었다. 유럽 국가들은 줄줄이 동인도 회사를 만들었는데 영국(1600~1858), 네덜란드(1602~1799), 프랑스(1604~1664), 덴마크(1729~1801), 스웨덴(1731~1813) 이 그 나라들이다.
곧바로 영국의 뒤를 네덜란드가 따랐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는 1602년 3월에 네덜란드 4개의 무역회사를 중심으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1598년 네덜란드 의회는 과다한 경쟁으로 인한 서로 불이익을 받기 보다는 이들 회사들의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병합 회사를 설립하라고 권고했다. 이 조치로 인해 네덜란드 6개 무역 중심도시를 대표하는 17명의 대표자들이 병합 회사의 집행위원회가 됐다. 일명 17인 위원이라고 부르는 이 집행위원회에는 네덜란드 정부의 영향력 있는 고위 관리들이 포함돼 있었다. 동인도회사 본부는 암스테르담에 뒀고, 6개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부를 뒀다. 왜 동인도회사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당시 유럽에서는 유일한 아시아의 나라로 인도가 알려졌고, 아직 이름도 모르는 인도 동쪽의 모든 지역을 가리켜 동인도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이 된 것이다.
네덜란드 의회는 동인도회사에 통치권에 준하는 막강한 권한을 줬다. 필요시 현지에서 병력을 뽑아 군대를 조직해 네덜란드에 충성할 수 있도록 했고, 견고한 요새를 건설하고, 전쟁을 치를 수 있으며, 국가 간 네덜란드 정부를 대표해 조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사람이나 국가나 초심(初心)을 지키기는 매우 어려운 법이다. 거기에 욕망과 탐욕의 때가 끼면서 여러 이유가 붙고, 온갖 수단을 써서 결과를 합리화하게 된다. 초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 향료 무역에 무게를 뒀으나,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점점 이윤이 커지자 중국, 타이완, 일본으로까지 항로를 넓혔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들은 암스테르담을 출발하여 영국을 바라보며 도버해협을 거쳐 대서양으로 나왔다. 배들은 섬의 그늘을 끼고 남으로 내려와희망봉의 기항지에서 숨을 돌리고, 순다해협을 북상하여 자바섬 북쪽의 연안에 있는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네덜란드로 향하는 귀향의 뱃길은 인도양 북쪽 연안을 도는 항로를 이용했다. 그러나 동남아에서 암스테르담까지의 뱃길은 너무 멀었다. 네덜란드와 바타비아 왕복 편지를 이용하는데도 1회당 2~3년이 걸렸다. 오랜 교통의 시일로 인해 동남아 현지 업무에 불가피한 차질이 발생했다.
또한 타국과의 정치적인 관계도 걸림돌이 됐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할 일은 동남아를 먼저 선점해 눈에 가시가 되고 있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력이 문제였다. 스페인인 경우 1521년 마젤란이 말루쿠제도에서 필리핀인에게 피살 된 후 1564년이 되면 루손섬까지 아시아 식민지 거점 요새를 건설했다. 1542년 포르투갈의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인도 서부 해안 고아에 상륙했다. 또 1557년이 되면 포르투갈은 마카오에 식민지 정착지를 건설했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최초로 정복한 지역은 1605년 암본(Ambon)이었다. 이미 포르투갈은 1600년 새로 진출한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적대 관계에 있었던 히투인(Hitu)을 앞세워 해전을 벌이는 바람에 간신히 승리를 했지만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전투력이 소모됐다. 마침내 네덜란드는 1605년 2월 암본에 있는 포르투갈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히투인과 연합해 전쟁을 벌이려고 했으나 포르투갈인들은 싸울 여력이 없어서 네덜란드가 요새를 공격하기 전에 자기 손으로 암본의 요새를 내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암본의 요새를 점령해 '빅토리아(Vitoria)라고 이름을 지었다. 동인도회사의 목적은 식민지 건설이 아니라 되도록 많은 이익을 남기는 장사에 있었지만, 인도네시아 군도의 무역 독점을 위해서는 최후의 수단이었던 전쟁도 불사해야 했다(양승윤, 2014). 한편 네덜란드가 남부 말루꾸(Maluku) 지역에서 세력을 넓혀갈 때 1606년 북부 말루꾸 지역에서는 스페인 함대가 향료군도 최북단 지역에 있는 떠르나떼와 티도레 왕국을 굴복시켜 네덜란드 세력의 북상을 저지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 도시 바타비아 건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부터 1795년까지 무려 5000척의 선박이 네덜란드에서 아시아로 항해했고, 100만 명을 운송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인구는 150만명에서 200만명에 불과해 네덜란드인만으로는 그런 인구 대이동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필요한 인력은 동인도회사의 군인들로서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 소도시 사람들로 채워졌다. 반면 상대적으로 중요한 직책인 배를 운항하거나 회사의 사무직은 네덜란드인이 담당했고, 3000명 인원 중에 단 한 명만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대개의 인원들은 아시아에서 일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네덜란드인 이주자 가운데 여성은 거의 없었던 까닦에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기항지에서 가정을 꾸린 네덜란드인 남성들은 아시아인과 결혼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관할 아래 놓인 항구를 보면, 암본(1605), 바타비아(1619), 반다(1621), 카이와 아루(1632), 믈라카(1641), 타님바르(1646), 티도레와 쿠팡(1637), 마카사르(1669), 미나하사(1679), 그리고 1680년 이후에는 트갈(Tegal), 스마랑, 자파라, 름방, 수라비아가 있었다. 이곳에서 네덜란드식 도시 설계, 시행정, 생활 방식을 볼 수 있다(Jean, Taylor, 2023).
얀 피테르츠 쿤(Jan Pietersz Coen)이 1619년 5월 자야카르타(Jayakarta)를 정복한 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중심 도시를 만들고 상관(商館)을 두고 있었다. 도시 이름도 게르만족의 이름인 바타비(Batavi)에서 유래한 바타비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타비아는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네덜란드인들의 핵심 도시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바다의 해상로로써 언제라도 사방의 바다로 나가기 위해 네덜란드 함대와 항구, 정착지를 보호하기 위한 바타비아 성이 설계됐다. 성의 대포 아래에는 칠리웅 강 어귀 너머까지 장벽이 펼쳐졌다. 성안에는 각 종족 집단의 구역을 나누고 거기의 대표들이 배정됐으며 유럽인 구역에는 시청, 광장, 교회가 있었다. 2000명의 작은 항구도시에서 1632년 바타비아 인구는 8000명으로, 1670년이 되면 3만2000명, 1699년에는 7만1599명으로 늘어났다(Gerrit Jah Schutte, 2024). 네덜란드인들은 유럽에서는 노예 노동력을 부리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상황에서는 노예를 소유했다. 1819년 네덜란드 정부가 노예제를 폐지할 때까지 대부분 바타비아 주민들은 노예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