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 속에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외환위기 이후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또 하나 있다. 이른바 사해행위(詐害行爲)라는 것이다. 남들에게 빚을 진 사람이 재산을 처분하고 그 결과 남은 재산만으로는 빚을 다 갚을 수 없게 된 때에 그의 채권자가 채무자와 그의 상대방인 제3자 사이의 매매나 증여 등 처분행위를 취소하고 그 재산을 다시 채무자 명의로 돌려놓는 것이다.

민법에서는 채권자평등주의를 택하여 저당권 등 우선권을 취득하지 못한 채권자가 여럿 있을 때는 채무자의 재산을 경매 등으로 환가하여 각 채권액에 비례하여 나눠 갖게 되는데, 채무자가 그 재산을 함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 사해행위 취소제도다.

사해행위에 해당하려면 채무자에 대하여 금전채무를 부담할 것, 채무자가 재산을 처분한 후 남은 재산만으로는 빚을 다 갚을 수 없을 것, 채무자가 그 같은 사정을 알면서 재산을 처분하였을 것이 요구된다. 채무자로부터 재산을 매수하거나 증여받은 자, 교환한 자, 저당권을 취득한 자 등 상대방은 설사 정당하게 돈을 주고 샀더라도 다시 그 재산을 채무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만약 이때 상대방이 채무자에게서 그 대금을 돌려 받지 못했을 경우에는 판결을 받아 경매에 참여하여 회수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상대방이 예컨대 부동산소개소를 통해 생면부지의 채무자로부터 매수한 경우와 같이 위와 같은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재산을 취득한 때에는 구제가 되나 그런 사정을 몰랐다는 사실은 본인이 증명해야 한다.

채무자가 여러 채권자 중 1인에게만 저당권을 설정해주거나 그에게 채무와 공제하고 부동산을 대물변제 형식으로 이전하는 경우에도 사해행위에 해당한다.

채무자와 상대방이 채권자의 강제집행을 회피하기 위해 허위로 재산처분행위를 할 경우 형사상으로 강제집행면탈죄에 해당하여 형사처벌을 받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사해행위취소 재판은 채권자가 부동산의 매수인이나 저당권취득자 등을 상대방으로 하여 제기해야 하며, 그 처분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5년, 그 사실을 안 날부터 1년 내에 제기하여야만 한다. 채무자의 재산에 가압류나 가처분을 한 때 이미 타인 앞으로 저당권이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1년의 기간이 지나가버리므로 당장 법적 조치를 취해두어야만 한다. 재판에 승소하면 그 재산은 다시 채무자의 것이 되고 채권자는 경매 등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익은 다른 채권자와 같이 나누게 되므로 혼자서 독차지할 수는 없다. 즉 재판을 걸지 않은 다른 채권자도 경매를 신청하거나 경매에 참여할 수가 있다.
<양경승·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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