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00년의 교정 속으로 <2>제주고

제주사립의신학교로 시작 117년 역사
학교 역사 기념 '전농로' 명칭 부여
일제강점기부터 4·3, 한국전쟁의 '증인'

한국 근대 학교 발달은 조선 말기부터 이뤄졌다. 제주의 경우 최초 근대 초등 교육기관이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주북초)라면,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제주고등학교의 전신인 '사립제주의신학교'가 있다. 제주고는 질곡의 제주 근현대사를 거치며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동문과 지역사회의 끊임없는 관심과 지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 촬영한 오현단 내 위치한 제주공립농업학교 신교사 모습. 사진=제주고 100년사 기념관 내 촬영
1920년대 촬영한 오현단 내 위치한 제주공립농업학교 신교사 모습. 사진=제주고 100년사 기념관 내 촬영

# 중등교육 '발상지'

1894년 갑오개혁과 그 해 12월 홍범 14조 제정으로 신문화·신교육 도입 여건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인 한국의 근대 학교 역사가 시작됐다. 제주의 경우 1907년부터 그 역사의 궤적을 함께했다.

제주고의 전신인 사립제주의신학교는 이같은 시대적 변화가 이뤄지던 1907년 7월 1일 개교했다. 당시 제주군수였던 윤원구가 지방유지와 지역민들의 성금을 모아 도내 최초 중등 교육기관을 설립했고, 앞서 그 해 5월 초등 교육기관인 제주공립보통학교도 구축했다. 제주시 관덕정에서 백일장을 열어 학생을 선발, 연장자들은 의신학교에 연소자들은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제주고는 제주의신학교부터 개교 117년 동안 농업학교에서 관광특성화고로 변화하며 지역의 핵심 산업 인재를 키우는 요람 역할을 해왔다.

제주고의 건학 이념은 "학교는 나라의 기초이자,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이다. 나라의 흥폐와 백성의 야만스러움이 오로지 교육 하나에 달려있다"는 '흥국문민(興國文民)'이다.

1911년 7월 19일 12명이 첫 졸업한 이후 숱한 인재를 길러 내며 2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역사가 긴 만큼 교명과 학교 위치 변경도 잦았다. 

의신학교로 출발한지 2년 만에 '공립제주농립학교'로 공립 전환 인가를 받았고 공립농업학교, 공립간이농업학교, 농업고, 관광산업고를 거쳐 지금의 제주고에 이른다. 

학교의 첫 위치는 제주 유림의 결집체였던 귤림서원의 옛 터(현 오현단)였다. 이곳에 교사를 마련하면서 신학문과 구학문의 융합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인 귤림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전까지 210여년간 제주 교육을 이끈 장소이기 때문이다.

1976년 광양교지에서 노형교지로 학교 이전 당시 물건을 운반할 차량이 수월하지 않아 재학생들은 자신들의 의자와 책상을 직접 들고 이사를 했다. 제주고 100주년 기념관에는 제주고 여학생회가 이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쳐를 볼 수 있다. 김은수 기자
1976년 광양교지에서 노형교지로 학교 이전 당시 물건을 운반할 차량이 수월하지 않아 재학생들은 자신들의 의자와 책상을 직접 들고 이사를 했다. 제주고 100주년 기념관에는 제주고 여학생회가 이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쳐를 볼 수 있다. 김은수 기자

이후 1940년 학생 수 급증으로 전농로의 현재 제주국제교육원 부지로 이전했고, 1974년 현재의 노형동 제주고 교지로 이설됐다. 1977년 개설된 전농로(典農路) 명칭은 제주고의 70주년을 기념하며 '인재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교통상황이 좋지 않던 과거에 노형동으로 교지를 이설하며 학생들이 직접 책상과 의자를 5시간에 걸쳐 걸어 옮겼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 근현대사의 '증인'

제주고는 제주 근현대사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제주를 거점으로 하는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배출됐으며, 1909년 일본인들이 한라산 임야를 사유화 하려하자 측량과 졸업생들이 한라산을 무료측량, 침탈을 지켜낸 활약이 밝혀지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중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며, 제주4·3 때에는 토벌대의 사령부이자 주민들의 집단 수용소로 이용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고아 수용소가 되기도 했으며, 재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고남화 동문(40회)이 출정할 때 품고 간 학도병들의 출정 결의가 담긴 태극기. 교사와 동료들의 격려 서명이 있다. 사진=제주고 100주년 기념관
한국전쟁 당시 고남화 동문(40회)이 출정할 때 품고 간 학도병들의 출정 결의가 담긴 태극기. 교사와 동료들의 격려 서명이 있다. 사진=제주고 100주년 기념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제주 3·1 운동(조천 만세운동)의 주역인 김연배(1896~1923)와 해녀항쟁을 주도하고 해녀 노래를 지은 강관순(1909~1942), 조선변호사협회장 출신으로 항일운동가와 사상가들의 변론에 힘쓴 이창휘(1897~1934),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문준(1894~1936)도 모두 제주고 출신이다.

질곡의 제주 근현대사 한가운데 제주고 학생들이 늘 존재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교내에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학교에서 일제의 천황 교육 칙어 낭독에 묵념을 하지 않기도 했으며,교내 복도와 화장실 등에 대한독립만세를 적으며 저항하기도 했다. 식민지 차별 교육 철폐를 요구하며 교장 관사를 습격한 적도 있다. 

강치효 제주고 100년사 편찬위원장은 "제주고 100년 역사는 지역의 근현대사와 맥을 같이 한다"며 "수많은 선배이자 제주의 영웅들이 사회로 나와 제주의 역사를 일궜다" 고 말했다. 김은수 기자

2022년 제주고 100주년 기념관에 역사관이 문을 열면서, 학교와 동문의 역사를 담은 공간이 조성됐다. 김은수 기자
2022년 제주고 100주년 기념관에 역사관이 문을 열면서, 학교와 동문의 역사를 담은 공간이 조성됐다. 김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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