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물 100년사」 전문가에게 듣는다
묻혀 있던 물의 기록들
자료 발굴로 드러난 진실
상수도 시초 다시 쓰이다
최초 공공상수도의 역사
서귀포수력발전 과정도
하와이와 교류 18년 앞서
제주의 수자원 개발사는 단순히 기술적·행정적 문제가 아닌, 제주 사람들이 물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삶의 기록이다. 다만 그 중요성에 비해 체계적인 연구나 기록화는 더딘 실정이다. 이에 올해 제민일보가 편찬하는 「제주 물 100년사」 집필진으로 참여한 고기원 박사(제주곶자왈공유화재단 연구소장)로부터 제주 물 역사 정립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를 들었다.
고기원 박사는
제주대 해양학 이학사, 제주대 해양지질 이학석사, 부산대 수문지질 이학박사, 제주도 수자원 연구실장, 하와이주 호놀룰루시 수도국 파견연구원,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국토·물·환경분과 전문위원, 제주도 건설기술심의위원, 대한자원환경지질학회 전문위원, 제주도 환경자원연구원 물산업육성부장, 제주도수자원본부 수자원개발부장, 제주도개발공사 물산업연구센터장·품질연구본부장, 제주곶자왈공유화재단 연구소장
△제주의 수자원 개발과 관련한 기록화 현황은.
=제주도 수자원 개발 및 이용 내력을 정리한 책자는 2012년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연구원이 공동으로 펴낸 「제주 상수도 50년」이 유일하다. 그 당시 필자도 집필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집필에 필요한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8·15 광복 후 진행된 제주도 수자원 개발사업 관련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의 자료를 구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따라서 신문 기사와 조사·연구보고서, 학술논문, 일본인 학자들이 쓴 단행본, 제주도지 등에 의존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개선됐다. 국가기록물은 물론 신문 기사를 쉽게 검색할 수 있고, 필요한 자료를 전자 문서나 이미지 파일로 내려받을 수 있는 다수의 포털 사이트가 운영되고 있다. 1883년부터 1966년까지 발행된 신문을 이미지 파일로 제공하는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로부터 새로운 사실들을 찾을 수 있었다.
△최근 새롭게 확인된 내용이 있다면 소개해달라.
=신문 아카이브 가운데 몇 가지를 보면, 1922년 좌면(중문)·중동면(표선), 추자면에 공동정호가 설치됐고, 1925년에 제주성내에 용천수를 이용한 탄산음료를 만드는 '제주음료사'가 설립됐다. 또 제주성내에는 도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수급부(水汲負, 물지게꾼, 수상)에게 물을 사서 쓰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월평균 한 가구당 물값으로 3원(현재가치로는 약 2만원) 정도를 지출했다.
1929년에는 제주성내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산지천 공동정호를 개량함과 아울러 세탁장을 설치했고, 1930년에는 제주시 원전통(관덕정 인근), 칠성통, 북작로통에 하수구 시설 공사가 진행됐다. 1931년에는 1600원의 예산을 들여 산지천의 물을 발동기로 취수하기 위한 시설 공사를 했고, 1936년에는 추자도 상수도 가설계획이 수립돼 1938년에 준공됐다.
특히 1938년 일본중앙공업시험소가 진행한 제주도 최초의 수자원조사에서 모슬포에 관정을 뚫어 양수 시험을 실시한 결과, 1일 2000t의 지하수가 취수됐다는 사실이 이번에 새롭게 찾아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제주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살았던 제주면(읍)은 1923년 수도경영에 필요한 기본금 확보 및 조선총독부의 현지 조사 측량이 이뤄졌지만 1945년 광복 때까지 공공 상수도 가설은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추자도는 1936년에 공공 상수도와 전화 통신 설치가 계획됐고, 1937년 착공해 1938년 9월에 완공됐다. 이로서 추자도는 1928년 '우면 상수도'에 이어 제주도에서 두 번째로 공공 상수도가 가설된 곳이 됐다.
△제주에서 지하수 개발이 시작된 시기와 과정은.
=지하수 관정 개발에 있어서 지금까지는 1961년 애월읍 수산리에 최초의 관정이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혼선을 막기 위해 최초 관정 개발과 이용 목적의 관정 개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1938년 일본 중앙공업시험소가 모슬포에서 관정을 뚫은 것은 제주도 최초의 지하수 관정 개발로 봐야 하고, 1961년 애월읍 수산리에서의 관정 개발은 이용 목적의 최초 지하수 관정 개발로 구분해 기록돼야 할 것이다.
△제주 공공상수도의 역사도 소개해달라.
=국가기록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를 찾아냈다. 제주도 최초의 공공 상수도 급수 조례라 할 수 있는 '우면 수도 급수 규칙'을 제정하고 공포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3건의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그동안 '정방간이수도'는 일본인 사이고(西鄕武十)가 사비를 들여 1925년 정방폭포 북쪽 '정모시' 용천수를 서귀항 부근까지 파이프로 끌어들여 설치한 사설수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번에 찾아낸 문건으로부터 정방간이수도의 설치·운영 과정에서부터 적자경영에 따른 재정 악화, 이를 만회하기 위한 공공수도(우면수도)로의 전환, 수도급수 규칙 제정 및 공포라는 일련의 과정이 소상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제주도 최초의 공공 상수도는 1928년 우면 간이수도조합 소유의 정방이간수도를 우면이 1만8000엔을 주고 매입한 '우면상수도'이고, 이 상수도를 운영하기 위해 1932년 5월 21일 공포된 '우면 수도급수 규칙'이 제주도 최초의 공공 상수도 조례라 할 수 있다.
△서귀포 수력발전소에 대한 기록도 발견됐는데 어떤 내용인가.
=국가기록원 기록물 검색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자료는 서귀포 수력발전소 건설과 관련된 문서이다. 매일신보(1925년 3월 27일자, 1938년 8월 13일자)와 부산일보(1926년 7월 24일자) 기사에 따르면 서귀포 천지연폭포 물을 이용한 수력발전소 건설은 1925년부터 검토됐고, 1926년에는 조선수력전기회사 기술자가 현지조사를 하고, 어선용 제빙과 전등용 수력발전소를 세우는 계획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37년까지 실행되지 않다가 1937년 7월 16일 조선총독부는 같은 해 6월 12일 전라남도지사가 허가 신청한 '발전용 유수 인용(引用)을 위한 공작물 설치에 관한 건'을 허가했다. 이 문서가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일명 '서귀포수력발전소 설치'에 관한 자료다. 그 다음 해인 1938년에 사이고(西鄕武十)를 비롯한 서귀포 유지들로 구성된 전기가설 기성회가 조직됐고, 수량이 줄어드는 겨울철에도 85마력의 전기생산이 가능해 20t의 제빙과 서귀포 전체에 전등을 켜더라도 전력이 남는다고 평가됐다. 결국, 1943년 11월 20일 최대 출력 200㎾ 능력을 갖춘 서귀포 수력발전소가 건설됐다.
△그 외에 찾아낸 기록들을 소개해달라.
국가기록원 자료 중에는 1937년 5월 28일 전라남도가 조선총독부에 요청한 '제주도 토목사업비 국고보조 품신'이 있는데, 이 문서에는 도로 개량 및 개수공사, 지하수 조사계획, 상수도 및 부락 음료수 시설공사, 항만수축공사, 어승생 수력발전 공사에 대한 계획과 소요 예산이 상세하게 포함돼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은 2022년 김한욱 전 제주도부지사가 집필한 「제주개발 100년사」에 번역·수록돼 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하와이에서 발견됐다. 그동안 제주도-하와이 자매결연이 1986년 11월 25일 체결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보다 18년 앞선 1968년 8월에 제주도-하와이 카운티 간의 자매결연이 맺어진 사실이 확인됐다.
특이한 것은 제주도를 대표해 고 양정규 국회의원이 참석해 서명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이 하와이주에서 발행된 1968년 8월 16일자 태평양주보 4면에 실린 기사로부터 확인됐다. 국내 신문에도 보도됐다. 동아일보는 1968년 4월 16일자에 "양정규 의원 등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돼 제주도-하와이 카운티가 5월 중 자매결연을 맺을 예정"이라 보도했다. 제주도와 하와이 간의 교류는 제주도에서 지하수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시작됐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상 몇 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도 수자원 개발·이용의 역사를 정립하는 것은 "시작은 있으되 끝이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자료의 발굴 여하에 따라 이전에 작성된 내용 중 일부분 또는 전부가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