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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50일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진석을 보자 어쩔 수 없이 웃음부터 터져나왔다. 그 이전에도 결코 뚱뚱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몸매였다. 차라리 건장하다는 표현이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생 장 피에 드 포르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은 다음 스페인을 횡단하여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땅끝마을 피니스테레까지 이르는 장장 800㎞의 '카미노 데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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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일보
2010.09.08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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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뻔질나게 제주에 들락거리니 지인들이 자주 묻는다. 제주에는 언제 가는 게 제일 좋아요? 나의 공식적인 대답은 미리 정해져 있다. 사시사철 아무 때나, 태풍 불 때도 좋고 폭설 올 때도 좋고. 하지만 휴가를 낼 때마다 슬금슬금 상사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직장인들이 그런 빤한 대답은 집어치우라며 눈을 흘기면 보다 솔직한 모범답안을 내미는 수밖에 없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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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일보
2010.08.2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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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찜통더위와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내 생애 가장 무더운 여름이다. 단순히 덥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습도까지 높아 일본이나 홍콩의 날씨를 연상시킨다. 끔찍한 것은 이런 더위가 8월 내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런 이상기후 현상이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어 매년 반복되리라는 사실이다. 자연이 우리가 저지른 패악의 빚을 받으러 온 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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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일보
2010.08.1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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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화려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매일 보는 얼굴들에 지치고 꿈도 흥분도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때. 온통 탈색된 듯 고만고만한 색들에 둘러싸여 어디 하나 방점 찍을 데를 찾을 수 없을 때. 그럴 때 문득 마주친 화려함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대상 없는 설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러나 또한 살다보면 화려함에 싫증날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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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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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심산스쿨의 하나 밖에 없는 교실의 칠판 옆에 큼지막한 와인셀러를 들여놓자 당시 강의 중이던 김대우 감독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여기가 도대체 학교야 술집이야? 아침에 심산스쿨에 들르니 웃음이 절로 났다. 책상들은 '수업 대형'에서 '술집 대형'으로 헤쳐 모여가 되어 있는 상태였고, 칠판 앞에는 아이스박스들과 서른 개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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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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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제1코스가 개장된 것이 2007년 9월이니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 이후로 매코스가 개장될 때마다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렸고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장행사라는 것 자체가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사람 붐비는 곳을 싫어하는 본래의 성품 탓이다.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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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1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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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전체가 월드컵에 환호하고 있다. 나 역시 월드컵의 광팬이다. 축구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류 역사상 최강의 조직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로마교황청도 아니고 볼셰비키도 아니다. 바로 국제축구연맹(FIFA)이다. 도대체 그 무엇이 축구를 세계 최강의 오락으로 만드는 것일까?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다. 나의 답변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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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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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말의 제주에서는 벌써 햇살이 따갑다. 아침 일찍 배낭을 들쳐 메고 모여든 일행들은 모두 다 약속이나 한듯 반바지 차림이다. 오늘의 일행들 중 반가운 얼굴은 10대의 두 소녀들, 출판기획자 이진아의 딸 노진솔과 나의 딸 심은이다. 노진솔은 해외유학 중 잠시 귀국한 상황이고 심은은 저 유명한 '한국의 입시지옥'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고 있는 중이라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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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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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긴 겨울이었다. 나라 안팎으로 악재들이 넘쳐나고 세월이 하도 뒤숭숭하니 봄이 와도 온 것 같지 않다(春來不似春). 인간사와 세상사에 치이는 것이 싫어 애써 무심해지려하는 사람일지라도 습관처럼 기다리는 것이 봄이다. 봄이 온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계곡의 얼음 아래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파릇한 새싹들 사이로 꽃망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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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6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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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많이 걸은 올레는 화순에서 하모까지 이어진 제10코스다. 이 코스는 물론 경관도 아름답고 길도 아기자기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이 코스를 사랑하게 된 것은 어떤 뜻에서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복잡다단하게 얽힌 인연의 실타래가 그리 풀려나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들의 실타래가 건물의 형태로 물화(物化)된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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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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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코스의 종점이자 제9코스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 대평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물고기'라는 카페가 있다. 영화감독 장선우가 운영하는 곳이다. 장선우는 1990년대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나는 그와 두 작품을 함께 작업했는데 불행히도 영화로 완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빵잽이'(교도소에서 복역한 사람을 뜻하는 속어) 출신으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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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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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제주도에서 젊은이들이 귀해졌다. 제주 출신의 젊은이들은 유학이나 취업을 위해 뭍으로 떠나가는데, 역으로 제주에 정착하러 오는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제주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다. 상주 인구가 아니라 유동 인구를 따져 봐도 마찬가지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의 상당 부분은 골프를 치러 온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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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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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의 전코스를 순례하다보면 세 번 들러야 되는 장소가 딱 하나 있다. 바로 외돌개다. 6코스와 7-1코스 그리고 7코스가 모두 외돌개를 출발점 혹은 도착점으로 삼고 있는 까닭이다. 외돌개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광 때문이 아니다. 키 큰 나무들 사이 파란 풀밭에 자리잡고 있는 야영장 때문이다. 야영장 텐트 앞 접이식 의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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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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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눈을 떴지만 몸이 찌뿌드드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어제 밤의 과음 탓이다.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을 한 김진석이 그 짙은 눈썹을 꿈틀대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몸도 날도 찌뿌드드한 이런 날 무엇을 하면 좋을 것인가. 나는 이미 대답을 포함한 질문을 툭 던진다. 네 카메라 방수되는 거지? 김진석이 피식 웃으며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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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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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를 대중화시킨 일등공신들 중의 하나는 저가항공이다. 저가항공의 매력은 합리적인 차등요금제인데, 얼마나 빨리 예약하느냐와 어떤 요일의 몇 시 비행기를 예약하느냐에 따라 할인폭이 천차만별이다. 내가 세운 최저가 기록은 왕복 비행티켓을 4만원 이하에 구입한 것이다. 세상에, 4만원 이하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니! 상상만 해도 입이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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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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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제주올레 제5코스의 사진이 두 묶음 펼쳐져 있다. 하나는 내가 찍은 볼품없는 사진들이고, 다른 하나는 김진석이 찍은 볼만한 사진들이다. 그와 나는 서로 다른 날 이 길을 걸었다. 내가 걷던 날은 신비로운 바다안개(海霧)가 시야를 희롱하던 날이었고, 그가 걸었던 날은 눈부신 햇살이 카메라 뷰파인더를 가득 채운 날이었다. 두 사진을 번갈아보니 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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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2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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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나 산에서 술을 마시면 잘 취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경험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어젯밤 숙소에서 반가운 지인을 만나 씩둑꺽둑 받고차기로 밤을 패며 마셔댔는데도 아침에 눈을 뜨니 정신은 말짱했고 몸도 가볍다. 게다가 하늘은 또 어찌 그리도 맑은지. 더 이상 이불을 끌어안고 게으름을 피워댈 이유가 없다.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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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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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뙤약볕이 따갑게 내리쬐던 날이었다. 반팔과 반바지 밖으로 삐져나온 나의 수족은 곧 익어버릴듯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늘에 앉아 땀을 훔치며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킬 때마다 나는 투덜거렸다. 뭔 놈의 코스가 이 모양이람? 잠시 바다를 버리고 중산간으로 접어든 것까지는 좋아. 그렇다면 제대로 된 흙길이 깔려 있어야 될 것 아니야. 뙤약볕 아래 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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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일보
2009.10.29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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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까지 오가는 것은 분명 여행에 속한다. 하지만 제주올레만을 똑 떨어트려놓고 들여다보자면 여행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산행도 아니고 도전도 아니다. 오히려 산책에 가깝다. 이따금씩 야트막한 오름에 오를 때를 제외해놓고 보면 도처에서 민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늘밭이나 과수원 혹은 해녀들의 탈의장 같은 곳을 지나칠 때면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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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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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것, 아니 남들'만큼' 할 수 있는 것을 딱 하나만 꼽아 보라면 그게 바로 '걷기'다. 사실 세상에 걷기보다 평범한 일도 없지만 걷기보다 비범한 일도 없다. 특히 '인간의 걷기'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우주사적 사건'이다. 두 발로 걷기, 유식한 말로 표현하여 '직립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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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6 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