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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럽고 힘들어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이 없다. 겨울이 지나고 우리에게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새로이 다가온 봄에는 모든 것이 생동한다. 4월의 전경(前景)은 '잔인한 달'이 아니라 순정한 아우성으로 몸부림친다. 세상의 모든 꽃과 초목들이 자연의 거대한 축제에 빠질 수 없다는 듯이 연두의 빛깔로 얼굴을 내민다. 연두의 빛깔에는 지금 막 시작하는 생명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 같은 것이 담겨있다. 날이 따뜻해져서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나오긴 했지만 족두리 쓴 새색시같이 부끄러운 표정이 가득하다. 한겨울 숨어 있다가 사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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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4.1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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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왔다. 거리 곳곳에서는 후보자들의 현수막이 널리고 선거운동의 열기가 혼돈스럽다. 총선을 위해서 우여곡절 끝에 결정된 여야의 후보들이 사활을 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아무리 정치가 생물이라고 하지만 판세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그야말로 투표함을 모두 열기 전까지는 누가 선량인 국회의원이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민이 선택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후보에 오른 인물 중에서 적임자인지를 가려내야 하는 엄중한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과연 어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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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4.0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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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춤의 역사는 오래다. 춤은 무용(舞踊)이나 무도(舞蹈)라고 불리면서 영어로는 댄스(dance)라고 일컫는다. 한자어인 '춤출 무(舞)'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춤을 추는 사람인 '무당'을 의미하는 '무당 무(巫)'에서 유래한 말이다. 어느 경우이든 춤은 생명의 욕구나 일상생활의 체험과 감정을 율동으로 표현하는 의미를 가졌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 가장 자연스런 감정의 신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춤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예술이며, 모든 예술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춤이 나타난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인간이 집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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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3.1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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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나고 봄이 올 때가 훨씬 지났지만, 겨울은 끝나지 않고 봄은 좀처럼 오지 않고 있다. 곳곳에서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면서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 그야말로 봄은 봄이로되 봄은 오지 않았다.중국의 전한(前漢) 시대 임금인 원제의 절세미인 궁녀였던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와의 화친정책에 의해 흉노왕에게 시집을 가게 된 불운한 여자였다. 그 여자를 두고 지은 동방규의 시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이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은 날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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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3.0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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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일생동안 많은 눈물을 흘린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흘리는 출생의 눈물, 어린 시절 부모들로부터 야단을 받으면서 흘리는 눈물,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으로부터 느끼는 실의의 눈물, 친구와 연인들로부터 배신당하고 흘리는 눈물, 삶은 눈물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체로 인간은 신체적 자극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정신적인 이유로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 눈물은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욕구와 감정의 표현 방식으로 이성과 감성, 마음과 영혼의 갈등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유아기 시절의 인간은 언어를 습득하기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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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2.19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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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은 해이다. 그렇지만 봄이 가까워 오면서 첫눈의 기억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언제나 '첫'의 기억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첫사랑, 첫눈, 첫차, 인생에서 첫 기억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 첫 기억을 생각해 보기 위해 과거로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본다. 첫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도 많지만 기억할수록 어렴풋하기만 하다.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때로 인생의 첫 기억은 흐릿하게 남아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인생의 시작이 어디에서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듯이, 인생을 끝내고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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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2.0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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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많다. 때로는 편리함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때로는 경제적 이유로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 우리 곁에서 사라지고 있다. 휴대전화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춘 공중 전화 박스, 동전 몇 닢으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시골 장터···. 사라져 가는 것들은 모두 그리움으로 남지만, 손편지의 상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벚꽃이 떨어지지 않고 항상 나무에 매달려 있다면 사람들은 벚꽃 구경을 가지 않을 것이다. 벚꽃이 흩날리며 우리 곁을 떠나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떠나는 벚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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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1.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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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얀 눈 천지다. 겨울에 눈이 내리는 것은 당연한 자연 현상이지만 올해는 유별나게 눈 내리는 날이 많다. 산과 들판, 도시에도 눈이 내려 하얀 세상을 이루고 있고, 곳곳에는 잔설이 수북이 쌓여 있다. '희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른 결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그 가운데에서도 '희다'는 색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깨끗함' 혹은 '순수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대로 그것은 쉽게 오염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면서, 건너편에 존재하는 검은색의 의미를 연상한다. '희다'라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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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4.01.08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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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지 못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탓인지 공정하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처럼 보인다. 공정을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공정한 사람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공정함에 대한 인식과 요구는 갈수록 높아져 가고 있다.공정함이란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선이나 정의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언어나 행위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사회와 개인들은 공정하지 못한 언어와 행동들에 대하여 깊은 자각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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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12.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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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없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의식주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그 중에서도 밥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입는 것과 주거가 없이도 그냥그냥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인간이든 동물이든 먹지 못하면 당장 생명의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밥은 곧 생명이다. 한국인들의 흔한 인사는 "밥은 드셨습니까."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같이 밥으로부터 시작된다. 인류 전쟁의 역사를 곰곰이 살펴보면 많은 전쟁이 궁극적으로 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의 반의어인 평화(平和)를 한자로 들여다보면. "공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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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12.04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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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란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의 표현 방식이다. 때로 눈물은 슬픔을 해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태도를 이루게 된다. 흔히 인간의 욕구란 생존을 위한 욕구, 생리적 욕구, 애정과 공감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으로 다양하게 구분된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눈물로서 감정을 토로한다. 갓난아이들이 배고플 때 우는 것은 같은 이치다.눈물의 원인과 종류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감정이 고조될 때, 이를테면 슬프거나 낙심이 되는 상황일 때 눈물을 흘린다. 그렇지만 행복할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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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11.2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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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사회적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태평양에 방류된 오염수가 1년 안에 동해로 유입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알려지면서 해산물 먹거리 안전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해산물은 안 먹으면 되지만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안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형 식품업체들이 미리 소금을 확보해서 소금은 없어서 못 판다고 하며 심지어 소금 도둑마저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옛날부터 소금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소금은 다른 어떤 음식보다도 중요한 음식이었다. 지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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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6.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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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을 연두로 물들이던 봄의 시간은 잠시, 그들은 다시 초록이라는 영원의 시간으로 경계를 넘어갔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고귀한 순간이나 충만한 시간이란자아와 타자에 의해 혹은 머물렀던 과거 현재 미래가 완전히 융합되어 새로운 상태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시간과 지금 서 있는 이 순간에 가장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는 긴 일생을 살아가지만 사실 모든 것은 '잠시' 동안의 시간에 이루어진다. 연두의 시간이 초록으로 몸 바꾸어가는 것도,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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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5.2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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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비가 내리고 나니 세상에는 생명의 소리가 요란하다. 꽃들은 곳곳에서 폭죽처럼 뽕뽕 모습을 드러내고 산속에서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교향악과 같이 들린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이 이 번잡한 세상에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온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노래한 거와 같이 자연은 어린아이가 무지개를 볼 때 느끼는 거와 같은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워즈워스는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출생이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동안 이 호수지방에서 보냈다.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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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5.0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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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년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을 질곡과 공포에 떨게 하던 코로나팬데믹의 시대가 끝나고 지구 곳곳에는 활기찬 모습이 완연하다. 사람들은 '여행하는 인간(Homo Viator)'이 되어 어딘가로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고 있다. 여행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 안에 있는 일탈과 새로움의 본능을 흔들어 삶의 역동성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오랫동안 코로나로 연기되거나 봉쇄되어 있던 문화행사도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리스의 에피다우르스 극장에서는 고대비극작가들의 작품이,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는 세계오페라공연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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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4.24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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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과학기술 만능 시대에 살면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가장 심각한 우려와 회의(懷疑)는 대체 인간들에게 영혼이 있는가. 영혼은 무엇이며, 영혼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을 말하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인간의 탐욕과 타락과 위선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그러할 때 대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생각해보면, 이 같은 의문이 어제오늘에 나타난 일은 아니다. 삶을 살아갈수록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거짓과 탐욕이 보편적 습성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습성이 개인적인 타락은 물론, 심지어 사회적인 폭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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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4.1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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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는 신비로운 물고기다. 하천에서 치어 시절을 보낸 뒤 바다로 나갔다가 수년 뒤 알을 낳기 위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오는 회유성 어종이다. 이 독특한 회유 습성으로 인해 연어는 생태계에서 매우 중요한 생존의 의미와 모습을 보여주는 생물로 기록된다. 연어의 생애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감탄과 경외가 자연스럽게 우러난다. 무수한 삶과 죽음의 위험 속에서 용감히 맞서고, 온갖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으며 생존을 위한 사명을 다하려는 숭고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 반드시 돌아와 알을 낳아야 한다는 생존을 위한 회귀성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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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3.2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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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며칠 사이에 갑자기 봄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겨우내 땅속에서 꿈틀대던 복수초가 돋아나오고 정원에서는 새순과 꽃망울이 움트면서 봄이 왔다는 것을 알려준다. 온 겨울 웅크리고 눈치만 살피고 있던 초록의 새순들이 뽕뽕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 외투를 벗어던지고 봄을 맞이하며 봄의 향기를 맡아본다. 그동안 봄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일까. 새롭게 다가온 봄은 살아 움직이면서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봄은 햇살 같은 마음을 담고 있다. 양지에 먼저 든 햇살은 개나리 얼굴 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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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3.13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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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한 두 번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오래 전 문학 공부를 시작하던 시절 가장 충격적으로 읽은 소설 중 하나는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본격적으로 카프카의 여러 작품을 접하면서 갈수록 심한 충격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송」 「성」 「선고」 같은 작품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왜 나는 카프카를 잊지 못하고 그의 글들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인가.카프카의 중편소설 「변신」은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나니, 거대한 벌레로 변해버린 한 남성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전말을 묘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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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3.05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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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이제 거리에서도 모임에서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보기 힘들다. 이제 자유다, 얼마나 긴 억압과 폐쇄로부터 다시 얻게 된 자유인가. 사람들은 쾌재를 부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코로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질병은 어떠한 폭력보다도 더 강렬하게 우리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그렇지만 인간은 전혀 반성이 없다. 반성은커녕 마침내 마스크를 벗게 되었다면서 '코로나 이후'의 삶을 구상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코로나라는 질병이 준 고통보다 더한 어둠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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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문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2023.02.14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