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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끝자락에 걸린 나뭇잎이 하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붉어지고 있다. 가을이 짧아진 탓에 나무들도 바짝 긴장했을 터다. 일조량에 의해 낙엽의 색깔도 언제 붉어질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요즘 같으면 참 헷갈리겠다. 그래도 비가 오면서 바짝 추워지는가 싶더니 금세 잊고 사나흘 햇살이 적당해서 나들이 또는 행사를 치르기엔 여한 없는 날씨다. 낙엽 다 지기 전에 나뭇잎 좋은 시절을 오래 눈에 담고 싶을 뿐이다. 노랑이나 빨강이나 초록이나 다 고운 색이지만 아직은 푸르름이 더 좋은 나이인가 싶다. 아니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나이를 붙잡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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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11.24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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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젖은 숲의 물영아리는 바람 소리마저 길을 잃은 채 고요했다.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박자박 걷는 발걸음 소리와 비옷 부딪히는 소리만이 숲을 점령하고 있었다. 간간이 까악까악 들리는 까마귀 울음소리는 자신들의 고요를 깼다고 나무라는 말처럼 들렸다. 생각지도 않게 참여하게 된 '사운드 워킹'은 모처럼 신선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숲의 소리에 집중해보긴 처음이다. 아무리 집중해봐도 들릴 듯 말 듯 한 난청에 자괴감마저 들었다고나 할까. 청음기를 귀에 꽂고 걷는데, 이게 숲에서 나는 소리인지 내 몸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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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11.1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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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도 적당한 시월의 주말, 표선해수욕장을 찾았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따라나선 여행객들 한 무리가 제주 나들이를 했단다. 4·3의 흔적이라곤 표지석 하나뿐인 한모살 유적지를 둘러보고 사람들은 해수욕장 팔각정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소설책을 꺼내며 여기가 거긴가 살피는 모습들이 아이처럼 호기심 어린 눈썰미다. 표선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설명하는 한 시인의 격앙된 목소리 너머로 흰 새 두 마리가 두리번거리고 있다. 지금부터는 자신들의 시간이라 여겼던 새들이 갑작스레 몰려든 인파에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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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10.27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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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새별오름에서 만나기로 한 것 같은데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카톡을 열어 보니 하루 일찍 찾아왔다. 혼자서 오름을 오르며 오랜만에 억새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덩굴 숲에 길게 늘어뜨린 하얀 꽃이 며느리 질빵인지 사위질빵인지 헷갈려하는 사이, 노을은 저만치 산을 감싸며 번지고 있었다.산이 산을 감싸면서 온 사방이 붉은 수평이다. 먼 산은 키를 낮추고 앞산은 허리를 펴고 서로 맞추며 수평을 이루는 것들이 평화로워 보였다. 억새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바람 없는 저녁을 흥겨운 춤으로 맞이한다. 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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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10.13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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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뒤편에서 검은 구름이 희미하게 밀려오고 갈매기들이 간간이 날아 들었다. 비양도로 향하는 뱃머리엔 적잖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검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검표원에게 물었다. "갈매기들은 언제 많이 볼 수 있어요?", "날 궂은 날요" 검표원의 대답은 짧았고, 오늘이 날 좋은 날인지 날 궂은 날인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검은 구름이 밀려오는 걸 보면 날이 궂어질 가능성이 높기도 하다. 일정만 없더라면 이참에 비양도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아침에 영화를 보고 GV를 한다는 것은 몸의 감각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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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9.2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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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지는 시간의 임진각은 어둠과 붉음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걷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였다. 바람개비 언덕을 넘는데, 낯익으면서 묵직한 설치물이 눈에 들어온다. '통일 부르기' 조형물이라는데, "산 자여 따르라"는 노랫말이 생각나기도 하고 이유 없이 끌려간 이들의 외침이 환청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추석을 앞두고 많은 발길이 이곳 임진각을 찾을 듯하다. 오늘이 마지막임을 에감하며 찾는 이도 있을 테고, 어딘가에서 총소리가 들릴 것 같은 두려움에 잔뜩 긴장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북에 두고 온 가족이 있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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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9.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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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이라고 하기엔 아직 아쉬움이 남았는지 저녁이 다가오는 시간에도 해수욕장에는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곳에 눈을 고정하고 연신 손을 내젓는 이의 안타까움이 보일 법도 하지만 지금을 즐기는 자에겐 역부족인 듯하다.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여한없이 즐기겠다는 이의 열정을 그 누가 이기겠는가. 바닷가 앞 커피숍에 앉아 '깔라만시에이드' 한 잔 시켜놓고 가만 생각해보니 올여름은 바다에 발 한 번 담그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 같다. 시간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더위에 지고 만 셈이다. 콩밭에 들어앉아 김매던 시절의 여름도 이렇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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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9.01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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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줄기가 이웃집 담장에 달라붙어 무늬를 남기고 있다 해서 할 수 없이 잘라버렸다. 잊고 있었는데 올해 다시 피어 어김없이 이웃집 담장에 달라붙었다. 줄기가 올라가는 방향을 잡아주느라 이러저러한 방법을 써 보았으나 소용이 없다. 능소화도 누울 자리가 있어야 가지를 뻗는 것이다. 분명 한소리 들을 것이 뻔한데 어찌 해야 하나 지켜보고 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하니, 꽃이 담장을 덮는다고 한소리 들어야 할 일인가 싶어 씁쓸해진다. 오히려 담장에 무늬를 새겨주는 일 아닌가 마음으로만 항변하고 있다. 입추 지나면서 더위가 한풀 꺾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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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8.1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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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쿠폰 받은 기념으로 물회 한 그릇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흐뭇하고 여유로웠다. 지인네 밭에 들러 호박잎도 얻고 깻잎, 부추도 얻은 터라 더욱 그럴 것이다. 식사 중에 "이 더위에 누가 가장 힘들까?"라는 주제의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뜨거운 불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 야외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아스콘 작업하는 이들…, 등이 나열되다가 동석한 이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생각난 김에 가는 길에 들러보자고 해서 고개를 끄덕였다.무심코 따라가는 길은 익숙했다. 서귀포로 가기 위해서 늘 지나는 길이다. 30㎞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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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8.04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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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박을 주문하라는 문자가 여러 군데서 왔다. 처음에는 필요해서 주문했고 그 다음부터는 인정으로 주문하다 보니 단호박 장사를 해도 될 만큼 상자가 쌓였다. 할 수 없이 또 단호박 먹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갖다 주겠다는 문자를 보낸다. 지인 여럿이 미안한 표정으로 감사히 먹겠다는 답이 와서 일일이 나눠주는 일까지 마치니 진이 다 빠진다. 그래도 뭔가 나눠 먹었다는 기쁨이 있다. 미니 단호박이라 하니 다들 어떻게 생긴 호박이냐 자꾸 묻길래 "요만한 거야."라며 사진을 찍어 보냈다. 눈치 없게 "예쁘당"이라는 애교 섞인 답이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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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7.2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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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에는 폭염이 최악이다. 그나마 차로 이동하는 나들이라 표선면 인근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4·3의 흔적들을 찾아 나선 나들이에 여러모로 마음이 착잡해졌다. 초등학교 한편에서 발견한 '폭발사고 위령탑'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1950년 음력 5월 29일, 30여명의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을 기리는 탑이다. 4·3 당시, 표선초등학교에는 주민들을 진압하던 부대가 3개월간 주둔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 이곳에 수용되었던 주민들이 순차적으로 학살당한다. 군인들이 철수한 자리에는 폭탄이 묻어져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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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7.0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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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자욱한 금능바다. 섬은 안개에 싸여 고요하다. 센바람이 올 수도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짐을 싸는 이들이 보인다. 인근 도서관에서 모임이 있어 조금 일찍 도착해 바다를 둘러싼 길을 걸어본다. 바다의 색깔과 대조적으로 인근 식당과 가게의 불빛들은 신도시를 연상케 한다. 고양이 한 마리 가게를 낀 담벼락을 유유히 기어올라간다. 새끼고양이들이 "이야오옹" 울부짖으며 뒤를 따른다. 오일장 갈 때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나도 데리고 가. 나도 데리고 가"라며 발버둥을 쳤던 둘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날은 꼭 비가 내렸다.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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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6.2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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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일에 맞춰 어머니집을 방문했더니 어머니는 숨을 헐떡이며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투표를 하러 학교 운동장으로 걸어가다가 숨이 차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투표하라고만 하지 말고 이럴 때는 누가 업어다 주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린다. 할 수 없이 내가 그 일을 해보겠다 자청하고 어머니를 업고 인근 중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선거사무원들이 당황스러워하며 등에 업힌 어머니를 내린다. 어머니는 몸을 기우뚱하며 투표용지를 받고 장막이 쳐진 장소로 이동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장막 안에서는 어리둥절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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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6.0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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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이 누렇게 변하고 메밀밭이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다. 여름이 다가오는 듯하다가도 느닷없는 비가 반복되는 등 계절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한 이상기온이 불안하다. 메밀이 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구경꾼의 입장을 벗어나 생각하면 종잡지 못하는 날씨는 웅크린 꽃들을 떨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메밀은 척박하고 서늘한 땅에서 잘 자란다고 한다. 그런 땅에서 잘 자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존재가 척박한 땅에서 살려고 하겠는가. 생명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형상을 보고도 사람들은 자기만큼씩 생각하기에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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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5.2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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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 귀한 풍경 하나 보았다. 스님이 "우리 모두 부처가 돼 자비의 마음이 돼야 한다. 그럼에도 이 세상 미쳐 돌아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바라보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강아지는 아무 생각 없이 잠에 들었다.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 웃음소리에 잠시 깨었다가도 금세 눈을 감는다.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든 아이에게 '너는 세상 걱정없이 행복하길 바래'라고 속으로 말하던 지난 시절이 떠오른다. 섹섹거리며 아이의 콧소리는 고단한 하루를 잊게 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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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5.1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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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가 나를 불러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주렁주렁 열린 등나무꽃이 장관이다. 꽃향기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이 얼마 만인가! 꽃나무 아래서 쉬어 갈 수 있는 평온을 얻는다는 게 세상 좋기만 하다. 이 정도의 쉼에 만사형통을 느낀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래도 좋긴 좋다. 등나무꽃이 흐드러진 정원을 갖는 꿈은 다소 사치라 할지라도 내가 걸어가는 길에 이런 그늘을 만나 잠시 쉬어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그늘, 이게 평온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등꽃나무 아래서 듣는 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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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4.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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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한 번 크게 불더니 벚꽃잎이 거의 지고 말았다. 꽃잎 진 자리가 붉다. 내 손가락에 생채기가 난 것처럼 아프다. 무엇이 있던 자리가 비워지는 것은 어쩐지 스산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열매가 달린다는 것을 안다면 기죽을 일도 아닌데 말이다. 꽃 하나 피고 지는 것에 마음이 뒤숭숭한다는 것은 사치일 수 있으나 누군가에겐 가슴 한 귀퉁이 베인 듯한 아림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살던 나무 하나가 베어진다는 것은 산 하나가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일 것이다. 고승욱 개인전 '어떤 이야기'에서 제성마을 왕벚나무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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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4.14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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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이마다 몸에 돌덩이를 매달고 있는 것처럼 심신이 무겁다고 한다. 벚꽃이 만개한 걸 보고서야 봄이 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알아차리든 말든 자연은 재 할 일을 하고 있건만 사람만 제 자리에서 서성거리며 한 발짝도 못 나아가고 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룰렛을 돌렸을 때 어떤 숫자가 나올까 기다리는 초조함이라고나 할까. 이것도 저것도 비유가 마땅하지만 그처럼 불안하다는 뜻일 게다. 모두가 그럴 리는 없지만 내가 그러니 남들도 다 그런 것만 같다. 잠시라도 무거움을 덜어낼 겸 미술관을 찾았더니 돌덩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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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3.31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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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창문을 열었더니 빨래 걸이에 걸어둔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강풍 예보가 있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언덕 너머의 나무들이 휘청거린다. 소나무가 저렇게 많았었나 싶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해도 바람이 부니 가지 많은 나무 가 든든해 보인다. 양쪽 가지가 고르게 균형을 이룬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도 안정감이 있다. 그렇지 못한 수형의 나무는 휘청거림의 강도가 커서 보는 이를 불안하게 한다. 이러나저러나 나무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나라 걱정이 산과 같아서 입맛을 잃은 지 꽤 되었다.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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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3.1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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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코발트 광산 수평2구 갱도 속을 걸어가는 내내 한마리의 나방이 이리저리 흩어지며 쫓아왔다. 갱도 내에 사람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나방도 있고 박쥐도 산다고 한다. 생명체들이 폐광 내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갱도 주변으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물의 색깔을 살피게 된다. 허연 곰국같은 물 위로 기름방울이 둥둥 떠 있는 듯 하다. 물 속에 묻혀 있는 사람의 잔여물일 수 있다는 해설자의 말이 섬뜩하다. 어디선가 손 하나가 불쑥 솟아오를 것만 같다. 안전모를 쓴 머리가 천장에 쿵 하고 부딪친다. 사람이 서서 다니기에는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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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미 문학박사·제주대 스토리텔링 강사
2025.03.03 18:24